29일(현지시간)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후 인권 증진과 세계 평화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94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대화하는 모습(왼쪽)과 해비타트 활동에 참여한 모습(오른쪽).  한경DB
29일(현지시간)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퇴임 후 인권 증진과 세계 평화를 위해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94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과 대화하는 모습(왼쪽)과 해비타트 활동에 참여한 모습(오른쪽). 한경DB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39대)이 29일(현지시간)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100세.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오래 살았다. 피부암 등을 겪은 그는 건강이 악화하자 치료를 중단하고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호스피스 돌봄을 받았다.

퇴임 후가 더 빛났던 美 대통령…카터 영면하다
1924년 10월 1일 플레인스에서 태어난 카터는 해군 장교로 복무한 후 가업인 땅콩농장을 물려받아 경영하다가 1962년 조지아주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1970년 조지아주지사를 거쳐 1976년 대선에서 제럴드 포드를 꺾고 52세에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당시엔 ‘지미…누구?’라는 헤드라인이 나올 정도로 무명에 가까웠으나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사임 사태로 기성 정치인에게 실망한 대중은 정직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내세운 그를 뽑았다.

재임 기간은 순탄치 않았다. 경제 침체와 높은 실업률에 내내 시달렸다. 1979년 이란혁명으로 인한 석유 공급 중단과 유가 폭등, 주이란 미국대사관 인질 사태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세계적인 데탕트(갈등 완화) 분위기를 주도했다. 1978년 9월 안와르 사다트 당시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를 미국 대통령 별장인 캠프데이비드에 초청해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 평화협정 체결을 이끌었다. 덩샤오핑 중국 부주석과 협의해 1979년 미·중 수교를 성사시켰다. 하지만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한 불만이 누적돼 1980년 선거에선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후보에게 크게 패했다. 운하 통제권을 파나마에 돌려준 파나마운하조약은 국익을 못 지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란혁명 당시 팔레비 왕조를 포기한 것도 외교적 실패로 지목됐다.

퇴임 후가 더 빛났던 美 대통령…카터 영면하다
그가 빛난 것은 퇴임 이후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후 40년 넘게 인권 증진과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했다. 저소득층을 위한 집짓기인 해비타트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2017년에는 허리케인 이재민을 돕자며 조지 부시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캠페인을 했고, 95세이던 2019년까지 직접 해비타트 현장에 나갔다. 애틀랜타에 비영리단체 카터센터를 설립해 세계 각국에서 공정선거가 이뤄질 수 있도록 지원하고 민주주의 가치를 옹호했다.

공식 외교라인이 가동되기 어려운 상황에서 특사 노릇을 마다하지 않으며 분쟁 해결에 역할을 했다. 한반도 평화 문제에도 깊이 관여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신경전을 벌였지만, 북한이 1994년 영변 핵시설 사찰을 거부해 북핵 위기가 고조되자 평양으로 가 김일성 주석과 담판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 주석의 정상회담을 추진해 합의를 끌어냈으나 김 주석의 사망으로 성사되진 못했다.

이후 에티오피아 수단 아이티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 여러 분쟁지역에서 평화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중재자로 나서 ‘해결사 선생(Mr. Fix it)’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런 노력을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미국과 세계는 비범한 지도자, 정치인, 인도주의자를 잃었다”고 말했다. 장례식은 워싱턴DC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국장으로 치러진다.

워싱턴=이상은 특파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