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있으며, 대양에 둘러싸인 한반도 형상은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위태롭게만 보인다.
유라시아 대륙의 끝자락에 있으며, 대양에 둘러싸인 한반도 형상은 미증유의 위기 속에서 위태롭게만 보인다.
한국고등교육재단과 한국경제신문사는 11월부터 약 두 달간 ‘한국의 과거 50년, 미래 50년’ 공동 기획을 준비했다. 지금까지 해온 대로 하면 예상되는 미래는 무엇인지, 대한민국이 꿈꾸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지금 해야 하는 개혁 과제가 무엇인지를 제안하기 위해서다. 한경과 재단은 우리가 가야 할 미래상으로 ‘혁신적 품격사회’를 도출했다. 시민이 안심하고, 포용적이며, 활력 있고, 신뢰가 넘치는 생활을 일상으로 여기며 법과 행정 시스템에 대한 시민사회의 팽팽한 자발적 견제가 이뤄지는 것을 품격(格)을 갖춘 사회로 봤다.

하지만 그사이 미국에선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재선에 성공했고, 유럽엔 포퓰리즘 광풍이 불고 있다. 한국은 계엄과 탄핵이라는 정치적 급변 사태에 빠져들었다. 국격은 나락으로 떨어졌고 ‘내란’이라는 단어가 저잣거리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각 분야 전문가로 구성된 재단 교수진 9명은 “지금이야말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라며 “과거 방식을 답습하면 한국 사회는 만인을 향한 만인의 투쟁이라는 비극을 맞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미래에 대한 사회적 긴장감 부족해”

최병일 이화여대 명예교수는 현재 한국 경제와 관련해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가 실패한 뒤 혁신 생태계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진단했다. 2013년 이후 극심한 정쟁 탓에 ‘잃어버린 11년’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는 경제 성장을 중력의 법칙에 비유했다. “24시간 일할 수 없고, 자본을 늘리는 것도 한계에 부딪히면 바닥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며 “중력을 거스를 유일한 방법은 혁신뿐”이라고 말했다.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국은 지난 100여 년간 연평균 1인당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2%를 꾸준히 유지했다”며 “심각한 정치 갈등과 급증하는 정부부채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조차 캘리포니아주 한곳에 못 미칠 정도로 미국이 초강대국 지위를 지키는 것은 9할이 파괴적 혁신 덕”이라고 짚었다.

한국 역시 해방 후 80년 동안 역성장을 거의 겪지 않았다. 선진 기술을 베껴 조금 더 낫게 만드는 ‘인크러멘털(점진적) 혁신’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큰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송 교수는 “지금의 한국은 중국의 강소성 한곳의 경제 규모를 유지하기도 버거운 위기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파괴적 혁신이 절실하다”며 “정치인, 교수, 기업인 등 사회 지도층 대다수가 미국의 인공지능(AI)산업 지배, 유럽의 기후위기 대응 등 급격한 외부 변화를 밀어둔 숙제나 남의 일처럼 얘기한다”고 했다.

○“미래 전력 부재가 위기 근본 원인”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왼쪽부터),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가 특별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솔 기자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왼쪽부터),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명예교수, 송의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가 특별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이솔 기자
이번 기획을 총괄한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한국이 처한 위기의 근원 중 하나로 ‘미래 전략의 부재’를 꼽았다. 한국의 미래는 역동적인 캘리포니아(미국),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북유럽 복지국가, 유럽의 병자가 된 독일 등 그 어느 것 하나를 좇아서는 찾을 수 없다는 지적이다. 이 교수는 “한국적인 창조적 미래 전략을 짜기 위해 ‘담론 플랫폼’을 구축해야 하고, 실패 원인이 된 시스템과 메커니즘, 마인드 세트(마음가짐)에 대한 근본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재단 교수진은 최우선 과제로 제도화된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5년 단임 대통령제에선 같은 정당에서조차 미래 권력이 현재 권력을 끌어내리려 해 정책의 연속성이 끊긴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좌우를 대표하는 정당의 정책을 시민이 확인할 루트를 마련하는 것도 방법”이라며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배심원제 같은 시민 상원제를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 교수는 “양쪽 20%를 합하면 40%인데 현재 한국의 정치 제도는 이들이 번갈아 가며 100%를 독식하는 구조”라며 “탄핵 집회에서 풍자와 익살이 가득한 플래카드를 든 ‘중간의 60%’를 위한 선거제도와 정책 경로가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정서적 내전 상태의 선거 경쟁을 극복할 개헌과 선거법 개정, 정책 경쟁 중심의 정당정치로 전환하지 못하면 마비된 대통령제 정부, 선거만 유지되는 민주주의라는 미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규제 개혁과 유연성 극대화 절실”

'승자독식' 선거만 남은 민주주의…독한 대가 치를 것
재단 교수진은 경제 부문에서 당장 시작해야 할 과제로 규제 개혁과 유연성 극대화를 꼽았다. 이 교수는 “한국 사회는 신(新)신분제도가 시행되고 있다고 얘기될 만큼 지대추구적 행위(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사회적 자원을 소모하는 행위)가 횡행하고 있다”며 “대기업 정규직 근로자가 경직적 고용 보호 정책을 계속 요구하는 것을 포함해 ‘사회적 약자’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특권을 유지하길 바라는 이익집단 간 경쟁 구조를 개혁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같은 비효율적인 자원 배분을 막으려면 규제 개혁과 동시에 세금을 통한 소득재분배 방식을 좌우 세력 모두 화두로 꺼낼 수 있어야 한다고 교수진은 입을 모았다. 송 교수는 “좌파는 규제로 외부에서 오는 파도를 지연하려 하고, 우파는 경쟁을 통해 효율성만 높이면 낙수효과가 자연스럽게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좌우 둘 중 하나의 방식만으로는 외부 변화에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외부 변화를 사회가 껴안을 수 있게 하려면 규제를 없애야 한다”며 “의료 시스템 개혁만 해도 의사 수를 얼마나 늘리냐에 집착할 게 아니라 원격 의료 등 AI를 활용한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도록 의사 집단을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문재인 정부 때부터 좌파 진영의 주요 경제 테마인 ‘시장 소득의 균등화’를 ‘가처분 소득의 재분배’ 프레임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한국고등교육재단, SK 최종현 선대회장이 설립…국제화 선도 인재양성 학술재단

한국고등교육재단은 1974년 21세기 국가 방략을 찾을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됐다. 최종현 SK그룹 선대 회장이 재단을 세우고 이사장을 지냈다. 1998년 이사장에 취임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국제화와 아시아 시대를 선도할 학술 교류의 발판으로 재단의 위상을 격상했다. 2018년엔 글로벌 공급망과 과학기술 변화의 맥과 혈을 짚을 최종현학술원을 출범시켰다. 지난해 각각 설립 50주년, 창간 60주년을 맞은 한국고등교육재단과 한국경제신문사는 특별좌담회 등을 통해 ‘대한민국 미래 50년’을 위한 과제를 공동으로 모색하고 있다. 재단 연구 결과는 올 상반기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연구 참여 교수=최병일, 이재열, 송의영, 정인관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장훈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송지연·정혁 서울대 국제대학원, 김선혁 고려대 행정학과, 조인영 연세대 글로벌행정학과 교수

박동휘/강영연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