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카터와 한국 핵무기
며칠 전 세상을 떠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참 껄끄러운 사이였다. 1979년 6월 도쿄 G7 회담 후 카터가 서울에서 박정희와 만났을 때다.

미국 측은 한·미 간 초미의 쟁점인 주한미군 철수 문제로 카터를 자극하지 말아줄 것을 한국 측에 당부해 놓은 터다. 그러나 박정희는 본인이 수려한 필체로 직접 쓴 장문의 서한을 아무 말 없이 카터 앞에 내놨다. 카터의 턱 근육이 씰룩거렸고, 박정희는 손가락으로 탁자를 탁탁 치고 있었다. 두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타나는 버릇이다. 박정희는 이후 45분간 미군 철수 불가론을 폈다.

분기탱천한 카터는 옆방으로 박정희를 불러 “동맹국 정상 간 대화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언쟁을 벌였다. 청와대를 나와서도 화가 풀리지 않은 그는 차 안에서 참모들에게 박정희를 맹비난하면서 미군 철수를 강행하겠다고 열을 올렸다. 그런데 밴스 국무장관과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 등이 극력 반대했다. 이들이 미국 대사관저 앞에서 대통령 전용 리무진을 10분 이상 세워 놓고 논쟁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한국 전문가 본 오버도퍼의 <두 개의 한국>에 나오는 대목이다.

카터는 미군 철수론을 거둬들였고, 박정희는 100명 가까운 반정부 인사를 석방했다. 카터는 이 과정에서 박정희에게 한 방을 먹인다. 700개 가까운 한국 내 핵무기를 250개로 감축한 것. 1957년 아이젠하워 때부터 한국에 배치된 핵무기는 이때부터 줄기 시작하더니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인 1991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이 남한 완전 비핵화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박정희는 기실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었다. 닉슨의 미 7사단 철수 이후 프랑스를 파트너 삼아 독자 핵무장을 추진하고 있었다. 미국에 발각되고도 은밀하게 지속했다. 그가 일부 최측근에게만 한 얘기를 보면 1981년 국군의날 행사에서 독자 핵무기를 세계만방에 공개할 계획이었다. 핵무장론은 여전히 뜨거운 감자다. 그러나 두 가지만은 분명하다. 하나는 카터와 같은 미국 대통령은 언제든 나타날 수 있고, 또 하나는 우리 목숨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윤성민 논설위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