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ChatGPT 4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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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가 너무 비싼 거 아냐?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다른 데서 보수 낮춰서 비슷한 상장지수펀드(ETF) 낼 텐데" (최근 상장한 한 테마형 ETF의 포털 종목 토론방)

ETF 시장이 대장주 삼성전자 시가총액 절반을 훌쩍 웃도는 170조원 규모로 커졌지만 어쩐 일인지 자산운용사들 살림살이는 여전히 팍팍합니다. 지난해에도 3분기 기준 국내 운용사 절반 이상이 적자를 냈습니다. 업계에서는 '보수율 치킨 게임'으로 내모는 기관과 개인 투자자들의 '갑질'에 운용사 형편이 나아지기 어렵다는 토로가 나옵니다.

삼성자산운용이 ETF 보수 최저로 내린 배경은 '기관'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2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삼성자산운용이 최근 출시한 'KODEX 코리아밸류업' ETF의 총보수를 업계 최저인 0.008%(운용보수 0.001%)로 내린 데는 기관투자가인 '교직원공제회' 측의 언질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교직원공제회 측은 미래에셋자산운용과 KB자산운용, 키움투자자산운용 등이 낸 밸류업 ETF를 집중 매수해 왔습니다. 이들 상품은 밸류업 ETF 중 보수가 가장 낮습니다. 총보수가 미래에셋과 KB운용이 0.008%, 키움운용이 0.009%입니다. 이는 국내 상장 ETF 935종 중 최저 보수이기도 합니다. 삼성운용 밸류업 ETF의 총보수는 이들보다 조금 높은 0.0099%입니다.

이런 가운데 교직원공제회 측은 업계 1위인 삼성운용의 ETF를 매매하지 않는 이유로 '보수'를 꼽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교직원공제회는 상장 초기부터 연기금·공제회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밸류업 상품에 자금을 넣어 온 곳입니다. 지난해 11월 초 동시 상장된 밸류업 ETF들의 경우 주로 개인이 아닌 기관이 사들이고 있습니다. 때문에 기관을 놓치지 않기 위해 삼성운용은 보수 인하를 택한 모양새입니다.

기관들은 특정 운용사 브랜드에 로열티(충성도)를 갖는 편은 아니어서 개인들만큼 '브랜드 파워'는 중요하게 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수익률이 대동소이한 패시브(지수형) ETF를 두고서는 '보수가 얼마나 낮은지'가 최우선 고려사항입니다. 동시 상장해 성과를 가늠할 수 없지만 매수 압박을 받는 밸류업 등의 '정책상품'들은 더욱이 보수가 주요 척도가 됩니다.

"어차피 내릴 것 지금 내리지"…개미도 보수 갑질

여의도 증권가 모습. /사진=신민경 기자
여의도 증권가 모습. /사진=신민경 기자
투자자들로선 보수가 낮을수록 좋습니다. 운용사들도 순자산총액을 늘려 '규모의 경제'부터 이루려고 출혈을 각오하고 보수 파괴 전략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ETF 투자자의 '보수 갑질'이 심해지면서 운용사들이 신음하고 있단 지적이 나옵니다.

이런 경향은 기관뿐 아니라 개인투자자 사이에서도 나타납니다. 총보수가 0.5%만 돼도 '고보수' 지적이 잇따릅니다. 일례로 지난달 17일 상장된 'KOSEF 미국 양자컴퓨팅'을 사례로 들어보겠습니다. 출시 이후 키움운용 사무실로는 "보수가 너무 비싸다"는 항의 전화가 줄을 이었다고 합니다. 현재 이 상품의 총보수는 0.49%로, 1000억원어치가 팔린다고 가정해도 보수는 5억원이 채 되지 않습니다.

운용사 입장에서는 답답한 지점이 있습니다. '베끼기' 관행이 만연한 지금, 독특하거나 참신한 콘셉트의 상품을 내더라도 얼마 안 가 유사상품들이 나옵니다. 그 뒤로는 후발주자들과 경쟁하기 위해 원조 상품도 보수를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잠깐이라도 선점효과로 수익성을 챙기려면 보수를 조금 높여 내는 수 밖에 없습니다. 그밖에 △지수 독점계약을 해 상품 차별화가 있는 경우 △운용 상의 차별지점이 있는 경우 등에 운용사들은 높은 보수를 매깁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이런 상품에도 비판이 빗발쳐 곤혹스럽단 입장입니다.

한 중형운용사 ETF 담당 임원은 "최근 '곧 삼성과 미래도 더 낮은 보수로 출시할 텐데 어차피 내리게 될 텐데 지금부터 보수를 내려라'라고 하는 개인들 전화를 받았다"며 "식당에 가서 '가격이 비싸니 내리라'는 말은 안 하지 않나.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속상하고 답답하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중형운용사의 ETF 담당 직원은 "대체상품이 없어 고보수가 정당화되는 경우에도 '보수 깎으라'는 지적은 상당하다"며 "제로(0)로 이미 수렴해 가는 보수경쟁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양질의 상품을 기획하고 운용·관리하려는 의지 자체가 동력을 잃을 수 있다"고 토로했습니다.

운용업계는 한국거래소가 보수 경쟁에 개입해 주길 바라는 의견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분위기입니다. 사실상 출혈 경쟁을 시작, 주도하고 있는 대형운용사들 조차도 생각은 다르지 않습니다.

한 대형운용사 관계자는 "일본과 홍콩, 중국 사례만 봐도 법적 근거를 마련해 두지 않아도 창구 지도를 통해 운용사에 '보수가 너무 낮다'고 지도를 한다"며 "우리도 상장 전 거래소 등에서 최저보수를 규제해 줬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최근 운용사 간 보수 경쟁 한 가운데 있는 시장 참여자가 직접 쓴소리를 내기도 했습니다. 배재규 한국투자신탁운용 대표는 최근 언론에 "운용사들이 과도한 ETF 보수 경쟁을 자제해야 한다"고 발언해 이목을 끌었습니다.

신민경 한경닷컴 기자 radi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