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과 맞서리라" … 시라노는 못생겨서 낭만적이다
낭만적이다, 로맨틱하다. 흔히 남녀 사이의 애틋하고 헌신적인 사랑을 떠올리게 하는 수식어다.

뮤지컬 '시라노'는 조금은 다른 뜻에서 낭만적이다. 낭만의 사전적 의미는 "현실에 매이지 않고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사물을 대하는 태도". 주인공 시라노는 현실에 부딪히지만, 자신의 이상과 가치를 지키며 사는 고결한 인물이다.

시라노를 얽매는 현실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그의 외모다. 훌륭한 인품에 검술과 시에 모두 능한 인물이지만 기형적으로 큰 코가 그의 콤플렉스다. 두 번째는 불합리한 세상이다. 허영심 가득한 귀족들은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사람들을 깔보고 멸시하며, 전쟁에 시달리는 군인들은 끼니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전쟁터에 나서야 한다. 이런 부당함 앞에서도 시라노는 당당하게 "거인과 맞서리라"라고 외친다.

이런 비범한 인물조차도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한없이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시라노는 어릴 적 소꿉친구인 록산을 오랫동안 사모해왔지만, 자신의 못생긴 코 때문에 고백을 주저한다. 그런 마음을 알 리 없는 록산은 시라노의 부하인 크리스티안과 사랑에 빠지고, 시라노에게 둘 사이를 이어달라는 안타까운 요청을 한다.
"거인과 맞서리라" … 시라노는 못생겨서 낭만적이다
'다른 남자에 빠진 여인을 짝사랑하는 남자'라는 익숙한 삼각관계지만 뻔하지 않게 흘러간다. 흔한 사랑 다툼을 벌이는 대신 시라노는 록산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기꺼이 삼킨다. 크리스티안의 입을 빌려 노래하는 시라노의 고백으로 두 연인은 사랑을 꽃피운다. 그럼에도 시라노는 크리스티안의 이름으로 사랑의 편지를 전하며 남몰래 사랑을 전한다.

'지금 이 순간', '두 눈을 떠' 등 숱한 명곡을 만든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이지만 그중에서도 '시라노'의 음악은 유독 반짝인다. '시라노'를 상징하는 '거인을 데려와'부터, 서정적인 멜로디가 돋보이는 '마침내 사랑이', 하나의 작품처럼 기승전결이 담긴 '홀로' 까지. 공연이 끝난 뒤에도 여러 곡이 머릿속에 선명하게 메아리친다. 가사 한마디 한마디에도 서로의 말을 인용한 암시와 복선이 촘촘하게 얽혀있어 감동이 한층 더 진하다.
"거인과 맞서리라" … 시라노는 못생겨서 낭만적이다
컨디션 난조로 '겹치기 출연' 논란이 불었던 최재림도 완전히 부활한 모습으로 무대로 돌아왔다. 용감하고 쾌활하지만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는 어린아이 같아지는 연기가 완전무결해 밋밋할 수도 있는 캐릭터에 인간미를 더한다. 그러면서도 노래를 부르는 순간만큼은 공연장을 울리는 최재림 특유의 쩌렁쩌렁한 성량에 진짜 전장에 나서는 군인 같은 비장함과 결의가 느껴진다.
"거인과 맞서리라" … 시라노는 못생겨서 낭만적이다
죽음, 사랑, 비극 등으로 눈물을 내는 뮤지컬은 많다. '시라노'는 '고결함'으로 심금을 울리는 흔치 않은 작품이다. 밤하늘의 달처럼 홀로 꿋꿋하게 어둠을 밝히는 주인공의 낭만적인 이야기와 아름다운 음악이 코끝을 찡하게 한다. 밝은 보름달 앞에서 시라노가 자신의 큰 코를 당당히 치켜드는 마지막 순간에는 슬픔, 경외, 희망에 이르는 수많은 감정이 겹겹이 쌓인 복잡한 감동이 북받친다. 공연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2월 23일까지 열린다. 티켓은 7만원~15만원.

구교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