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 봐야 진짜 귀족…19세기 청년 교양필수 '그랜드 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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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세계를 만나는 출발점
파리·피렌체·베네치아…
2~3년에 걸쳐 여행하며
교양 쌓고 넓은 세계 경험
괴테·디킨스·메리 셸리
투어 경험담 소설에 반영
윌리엄 터너·카미유 코로
여행 풍경을 그림에 담아
부모가 투어리스트인
미국 화가 존 싱어 사전트
유럽서 태어나 교육 받아
벨 에포크 전유신
파리·피렌체·베네치아…
2~3년에 걸쳐 여행하며
교양 쌓고 넓은 세계 경험
괴테·디킨스·메리 셸리
투어 경험담 소설에 반영
윌리엄 터너·카미유 코로
여행 풍경을 그림에 담아
부모가 투어리스트인
미국 화가 존 싱어 사전트
유럽서 태어나 교육 받아
벨 에포크 전유신
랜드 투어는 17세기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의 귀족 청년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여행의 한 양상을 일컫는다. 투어리스트들은 당대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를 시작으로 프랑스의 주요 도시를 두루 거친 뒤 고대 유적과 르네상스 미술을 볼 수 있는 이탈리아의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을 2~3년에 걸쳐 여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랜드 투어는 여행을 통해 문화적 교양을 쌓고 다른 나라의 귀족과 교류하는 과정을 거쳐 궁극적으로는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한 성인 귀족을 양성하기 위한 필수 관문이었다.
예술 분야에서는 독일의 작가 괴테(1749~1832)가 자신의 그랜드 투어 경험담을 소개한 <이탈리아 여행>을 출간한 바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1797~1851)도 남편인 퍼시 셸리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그 경험을 소설 집필에 반영했다. 역시 영국 출신 소설가인 찰스 디킨스(1812~1870)도 1년간 이탈리아에 체류했던 그랜드 투어의 경험을 <이탈리아의 초상>이라는 에세이로 남기기도 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기차와 같은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해외여행과 중산층의 단체여행 등이 보편화되면서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그랜드 투어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여행을 통해 문화적 교양을 쌓고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그랜드 투어의 본래적 가치를 여전히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기간이 짧아지고 여행지 수도 줄어든 약식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영국의 화가인 윌리엄 터너(1775~1851), 프랑스 출신 화가 카미유 코로(1796~1875) 같은 풍경화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보편화됐다. 교과서에서 배운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대신 날씨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직접 보고 그 변화의 양상을 포착해 그린 이들의 그림은 이후 인상주의 미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19세기 이후로는 현대적인 그랜드 투어에 참여하는 미국인도 증가하게 된다.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부모는 과거의 그랜드 투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장기간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살아가던 부유한 미국인이었다. 사전트는 이들이 피렌체에 머무는 기간에 출생했다. 당시 세계 예술가들이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이동해 활동하는 일은 많았지만 사전트처럼 부모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리스트의 삶을 살면서 유럽에서 미술 교육을 받게 된 사례는 흔하지 않았다.
사전트는 19세에 미술 중심지 파리로 이주해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며 카롤뤼스 뒤랑 같은 당대의 유명 화가로부터 사실주의 화풍을 학습했다. 1884년 파리 살롱에서 발표한 작품 ‘마담 X의 초상’을 둘러싼 선정성 논란을 계기로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파리 미술계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사전트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초상화를 주로 그리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 그린 대표작 중 하나가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1885~1886)다. 영국식 정원에 핀 꽃들과 자신의 딸을 포함한 두 소녀를 그린 이 그림으로 그는 영국 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랜드 투어리스트인 부모의 영향인지 그 역시 이후로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과 미국을 오가며 화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전망 좋은 방’(1985)은 현대화된 그랜드 투어가 일반화된 20세기 초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가 1909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행을 떠나는 주체는 상류층 계급에 속한 젊은 여성 루시 허니처치다. 주인공 루시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 르네상스 문화를 학습하며 그곳을 찾은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게 된다.
이 여행을 마친 뒤 루시는 보수적인 영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인물인 약혼자 세실과 결별하고 대신 피렌체에서 만난 조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조지는 루시에게 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 인물, 즉 전통을 탈피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인물이다. 과거의 그랜드 투어가 주로 남성 귀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20세기 초 집필된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에서는 여행을 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바뀐 것 역시 변화된 시대의 일면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의 여성 루시는 그랜드 투어를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서 혹은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 여행은 결국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출발점이 됐다. 지금 내가 머무는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전망을 접할 기회가 여행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다. 다만 어딘가 경치가 좋은 곳으로 떠나야만 여행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랜드 투어를 경험한 과거 예술가들의 작품은 우리를 잠시나마 춥고 엄혹한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안식처이자 눈앞에 펼쳐진 알 수 없는 미래를 벗어나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줄 이정표가 돼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예술 분야에서는 독일의 작가 괴테(1749~1832)가 자신의 그랜드 투어 경험담을 소개한 <이탈리아 여행>을 출간한 바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인 영국 소설가 메리 셸리(1797~1851)도 남편인 퍼시 셸리와 유럽 대륙을 여행하며 그 경험을 소설 집필에 반영했다. 역시 영국 출신 소설가인 찰스 디킨스(1812~1870)도 1년간 이탈리아에 체류했던 그랜드 투어의 경험을 <이탈리아의 초상>이라는 에세이로 남기기도 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기차와 같은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해외여행과 중산층의 단체여행 등이 보편화되면서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그랜드 투어 시대는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여행을 통해 문화적 교양을 쌓고 자신을 성장시킨다는 그랜드 투어의 본래적 가치를 여전히 따르는 경우도 많았다. 기간이 짧아지고 여행지 수도 줄어든 약식 그랜드 투어가 유행하게 된 것이다.
미술 분야에서는 영국의 화가인 윌리엄 터너(1775~1851), 프랑스 출신 화가 카미유 코로(1796~1875) 같은 풍경화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보편화됐다. 교과서에서 배운 이상적인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화면에 옮기는 대신 날씨와 계절에 따라 변화하는 풍경을 직접 보고 그 변화의 양상을 포착해 그린 이들의 그림은 이후 인상주의 미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19세기 이후로는 현대적인 그랜드 투어에 참여하는 미국인도 증가하게 된다.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의 부모는 과거의 그랜드 투어를 연상시킬 정도로 장기간 유럽 전역을 여행하며 살아가던 부유한 미국인이었다. 사전트는 이들이 피렌체에 머무는 기간에 출생했다. 당시 세계 예술가들이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로 이동해 활동하는 일은 많았지만 사전트처럼 부모가 유럽 전역을 여행하는 그랜드 투어리스트의 삶을 살면서 유럽에서 미술 교육을 받게 된 사례는 흔하지 않았다.
사전트는 19세에 미술 중심지 파리로 이주해 에콜 데 보자르에서 공부하며 카롤뤼스 뒤랑 같은 당대의 유명 화가로부터 사실주의 화풍을 학습했다. 1884년 파리 살롱에서 발표한 작품 ‘마담 X의 초상’을 둘러싼 선정성 논란을 계기로 화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파리 미술계에서의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사전트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초상화를 주로 그리면서 명성을 얻게 된다. 이때 그린 대표작 중 하나가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1885~1886)다. 영국식 정원에 핀 꽃들과 자신의 딸을 포함한 두 소녀를 그린 이 그림으로 그는 영국 미술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랜드 투어리스트인 부모의 영향인지 그 역시 이후로도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과 미국을 오가며 화가로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의 ‘전망 좋은 방’(1985)은 현대화된 그랜드 투어가 일반화된 20세기 초 영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영국의 소설가 E M 포스터가 1909년 발표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서 여행을 떠나는 주체는 상류층 계급에 속한 젊은 여성 루시 허니처치다. 주인공 루시는 이탈리아 피렌체로 여행을 떠나 르네상스 문화를 학습하며 그곳을 찾은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게 된다.
이 여행을 마친 뒤 루시는 보수적인 영국의 전통을 상징하는 인물인 약혼자 세실과 결별하고 대신 피렌체에서 만난 조지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조지는 루시에게 보다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 것을 권유하는 인물, 즉 전통을 탈피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인물이다. 과거의 그랜드 투어가 주로 남성 귀족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면, 20세기 초 집필된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에서는 여행을 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바뀐 것 역시 변화된 시대의 일면을 보여준다. 20세기 초의 여성 루시는 그랜드 투어를 통해 다른 세계를 경험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성장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서 혹은 영화 ‘전망 좋은 방’에서 여행은 결국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주는 출발점이 됐다. 지금 내가 머무는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좋은 전망을 접할 기회가 여행을 통해 마련되는 것이다. 다만 어딘가 경치가 좋은 곳으로 떠나야만 여행이 시작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랜드 투어를 경험한 과거 예술가들의 작품은 우리를 잠시나마 춥고 엄혹한 지금의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줄 안식처이자 눈앞에 펼쳐진 알 수 없는 미래를 벗어나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줄 이정표가 돼줄 수도 있을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