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6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제6회 세계 인공지능 대회(WAIC) 개막식.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글로벌 기술 기업의 주요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리창 중국 총리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단어들이 쏟아졌다.

그는 영국 경제학자이자 시장경제 이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와 그의 저서인 <국부론>을 언급하며 “중국은 자유로운 무역과 글로벌 분업을 지지한다”고 역설했다. 동맹국에도 무차별적인 관세장벽을 세우겠다며 세계를 향해 협박을 서슴지 않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비난하기 위한 계산된 정치적 발언이지만, 이 장면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자유진영을 지탱하는 두 개의 대원칙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12·3 계엄령 사태 직후 학회 참석차 중국에 다녀왔다는 한 대학교수는 “중국 측 참석자들이 한결같이 민주주의가 얼마나 취약한(fragile)지를 얘기하더라”며 “중국에선 한국을 포함해 유럽 주요 선진국에서조차 민주주의 시스템이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중국식 발전 모델의 우수성을 알리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주요 7개국(G7) 나라 대부분이 민주주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프랑스는 정부가 예산안조차 통과시키지 못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2027년 임기 만료 전에 사임할 것이라는 게 현지 언론의 분석이다. 독일은 자동차 등 제조업이 붕괴하며 연정이 무너지고 또다시 선거를 치러야 할 처지다. 일본은 집권 자민당이 부패로 휘청거리면서 2009년 이후 처음으로 다수석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영국의 신임 총리인 키어 스타머는 최근 40여 년간 가장 인기 없는 총리라는 악평을 듣고 있다. 캐나다 역시 쥐스탱 트뤼도 총리에 대한 사퇴 압력이 거세다. 미국을 제외하고 G7에 속한 마지막 유럽국인 이탈리아만 비교적 안정적인 정치 상황을 구가하고 있지만, 조르자 멜로니 총리는 극우 정당의 대표로 한때 포퓰리스트라고 비난받은 정치인이다.

민주주의 위기가 자국 우선주의와 결합하며 글로벌 경제는 1970년대 석유 파동, 1990년대 냉전 해체, 2000년대 정보기술(IT) 버블과 금융위기, 최근 코로나 팬데믹에 맞먹는 불확실성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미국만 해도 ‘주식회사 USA’를 공공연하게 내세우고 있다. 중국이 막대한 보조금 정책으로 자국 기업을 우대하는 것에 맞불을 놓겠다는 전략이다.

유럽연합(EU)과 일본 등 다른 선진국도 적극적인 산업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최근 EU가 브뤼셀에 범스타트업 공동체인 ‘EU Inc’ 설립을 제안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영국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1000억달러를 5년간 더 지출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코노미스트지의 최근 분석에 따르면 자국 산업 육성을 위해 청정에너지, 전기차, 칩 분야에서 각국 정부가 제출한 산업정책은 2021년과 2022년 두 해에만 1500여 개에 달했다.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해 미국 우선주의가 현실화하면 이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박동휘/안상미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