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로 불린 두 여성, 자신의 얼굴로 모더니즘을 외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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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서정의 어쩌면 나만 아는 명작들
남국의 얼굴과 북국의 얼굴···
모더니즘 여성 작가들의 자화상
브라질 모더니즘 1세대 작가
아니타 말파치(1889-1964)
왜곡된 윤곽선과 선명한 색상 등
표현주의 성향 짙은 자화상 <바보>
보수파로부터 강한 비판 받았으나
모더니스트들 의식 깨워
핀란드 모더니즘 작가
헬레네 쉐르벡(1862-1946)
전통적 인물 표현 기법 대신
인물의 핵심을 단순화
말년 자화상은 하나의 상형문자 같아
남국의 얼굴과 북국의 얼굴···
모더니즘 여성 작가들의 자화상
브라질 모더니즘 1세대 작가
아니타 말파치(1889-1964)
왜곡된 윤곽선과 선명한 색상 등
표현주의 성향 짙은 자화상 <바보>
보수파로부터 강한 비판 받았으나
모더니스트들 의식 깨워
핀란드 모더니즘 작가
헬레네 쉐르벡(1862-1946)
전통적 인물 표현 기법 대신
인물의 핵심을 단순화
말년 자화상은 하나의 상형문자 같아
도스토옙스키는 <여름 인상에 대한 겨울 메모>라는, 형식은 소설이나 사실상 보고서라 할 만한 독특한 글을 남겼다. 여름의 유럽 여행 인상기를 겨울의 러시아에서 써 내려간 것이다. 물론 그 내용은 서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유럽’으로 대표되는 근대 문명을 고약하게 꼬집어 내려가면서 러시아의 사명을 강조하는 비판서라 볼 수 있으니까. 아무튼 그가 유럽 여행을 통해 러시아를 실감하듯 내가 이 야자수의 나라 브라질에서 본 그림의 작가는 자작나무의 나라 핀란드에서 본 또 다른 그림의 한 작가를 떠올리게 했다. 둘은 지난 세기 초반, 여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피하지 않고’ 그린 화가였고 각자의 나라에서 ‘뭉크’라고 불렸다.
상파울루 대학 현대미술관(MAC-USP)은 모딜리아니, 샤갈, 피카소, 미로, 칸딘스키, 키리코, 에른스트 등 이름도 화려한 전 세계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지만, 브라질 미술계에 ‘근대’를 선언함과 동시에 ‘여성’으로 등장한 아니타 말파치의 존재는 저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름을 잠시 커튼 뒤로 물리게 한다. 그의 자화상 <바보>(1916)를 보자. 치켜뜬 눈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다. 약간 뒤틀린 코의 위치에서는 자조적 요소가 묻어난다. 강렬한 노랑과 빨강과 초록의 과감한 사용은 자아와 세계의 팽팽한 대결을 말하는 듯도 하다. 불규칙적으로 쓰인 검은 윤곽선이 이러한 긴장을 배가시킨다. 아니타 말파치는 브라질 모더니즘 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1922년 '현대 미술 주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작품을 선보였다. 1889년 12월 2일 상파울루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독일계 미국인 화가였고, 아버지는 이탈리아인 엔지니어였다. 오른팔에 선천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탓에 위축을 교정하기 위해 세 살 때 큰 수술을 받았으나 평생 팔의 움직임이 썩 자유롭지 못했다. 10대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언어 및 회화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어머니로부터 그림과 외국어를 배웠다. 작가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열세 살이었는데, 인생에서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내 감수성의 깊이를 밝혀주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이상한 경험에 나 자신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죽음의 감각이 나를 빨아들였습니다. 나를 위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강한 감정이 나라는 존재를 결정적으로 해독해 주리라 생각했어요. <...> 어느 날 집을 나와 기찻길 침목 밑에 누워 기차가 나를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 공기의 이동, 숨이 막힐 듯한 온도는 내게 섬망과 광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바로 그 색, 유령이 지나가는 망막에 영원히 고정하고 싶은 색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계시였습니다. 나는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돌아왔습니다,”
브라질 예술에 모더니즘을 선언하다
1910년 대부였던 삼촌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말파치는 베를린으로 떠났고 거기서 표현주의 기법을 터득했다. 독일 쾰른에서 열린 전시회를 방문하여 반 고흐를 비롯한 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유럽의 임박한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 가운데 작가는 브라질로 돌아와 1914년 첫 개인전을 열고 표현주의 양식의 영향을 맘껏 펼쳐 보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브라질 평단으로부터 혹평이 쏟아졌고 그녀는 다시 한번 뉴욕으로 떠나 현대 회화 화풍의 실험에 매진했다. 1917년 상파울루로 돌아와 개인전을 여는데 표현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 53점을 출품했고, 이 행사는 브라질 모더니스트 운동의 이정표가 된다.
<바보>(1916)는 바로 이때 등장한 작품인데 아카데미즘이 지배적인 상파울루 문화 엘리트의 보수파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전시회를 방문한 비평가가 신문에 <편집증인가 신비주의인가?> 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며 강하게 비판하자 말파치는 한동안 외부와의 소통을 끊고 고립을 자처할 만큼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시도는 젊은 문인과 시각 예술가들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스스로를 모더니스트라고 부를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시인이자 음악가인 마리우 지 안드라지 같은 이는 브라질에 당도한 현대미술의 혁명적 도전성을 감지했다. 그렇게 이른바 5인 회(Grupo dos Cinco)가 결성된다. 브라질의 문화적 파노라마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은 야심 찬 그룹이었다. 그러니까 <바보>는 전통 미술과 결별하고 현대적이고 혁신적이며 독립적인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브라질에 모더니즘 미학을 처음 알리고자 했던 여성 예술가의 ‘나는 바보로소이다’라는 처참한 고백이자 꺾이지 않는 선언문 같은 작품이었다. 파리와 뉴욕을 거치며 새로운 예술에 눈뜨면서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느낀 이가 감추지 않고 내뱉는 자기 고백. 게다가 자연주의적 재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혹한 비판에 직면한 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기도 하지 않은가. 말파치는 이후 과감한 표현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일상적인 대상을 두껍게 요동치는 왜곡된 윤곽선과 선명한 색상으로 그려낸 그녀의 작품들은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강조하는 도심의 일상적인 장면을 그림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표현 양식 면에서도 갱신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을 지향한 만큼 정확한 형태에 집착하지 않았고, 이는 전통적인 미적 감각에 태생적으로 도전하는 셈이었던 것. 브라질 여성 아방가르드 화가 맨 앞자리에 아니타 말파치를 놓아본다.
뭉개진 얼굴이 주는 위로
야자수 나라의 그림이 위와 같은 사정을 지녔다면 자작나무 나라의 사정은 이러하다. 헬레네 쉐르벡이란 화가 이야기다. 그녀 역시 문화적 변방에서 여성 화가로서 조국 ‘근대’ 미술의 얼굴이 되었고 주변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주로 그렸다. 물론, ‘여름’과 ‘겨울’처럼 이들 삶을 둘러친 생의 커튼은 다른 질감과 채도를 지녔다. 겹겹이 쌓여 침묵에 이르는 이야기의 압축이 그녀의 얼굴 속에 있다.
1862년에 태어나 열한 살에 핀란드미술협회 드로잉스쿨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그녀가 1879년 <빌헬름 폰 슈베린의 죽음>이라는 작품으로 핀란드 미술협회 상을 받았을 때는 열일곱 살이었다. 당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세였던 여성 화가로서 남성 화가들의 텃세가 심했던 역사화 부문에서 실력을 입증한 셈이었고, 이듬해 러시아 황실 원로원의 후원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와 브르타뉴 지방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회화 기법들을 익히며 자신만의 페인팅 스타일을 구축했다. 매해 핀란드 미술협회에서 주관하는 전시회에 그림을 걸어 소장자를 찾고, 책에 들어갈 삽화를 끊임없이 그리는 방식으로 재원을 확보하던 그녀는 미술협회 한 후원자의 지원으로 영국 여행의 기회를 얻는다. 그때 탄생한 작품 <회복기>는 1889년에 열린 파리박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한다. 이후 1890년대에는 자신이 처음 붓을 잡은 핀란드 미술협회 드로잉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정기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할애한다. 헬싱키 근교 소읍 히빈카와 타미사리에서 각각 23년(1902~1925), 16년(1925~1941)을 지내며 화가는 거의 주변 사람들을 그렸다. 어릴 때 사고로 다리를 절었던 그녀는 19세기 핀란드 시골의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독특한 색감의 그림을 통해 스스로의 영혼을 해방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모더니스트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때가 바로 이 시기이다.
19세기 태어나 그림을 익혔던 화가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세기적 현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실물과 유사하게 그리는 전통적 인물 표현 기법을 철회하고 그 인물됨의 핵심을 파악해 점차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대상은 점점 나이 들지만, 화가의 붓질은 점점 젊어진다. 동일 인물을 애정을 가지고 오랜 기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의 매력이 충분히 느껴진다. 그리고 그 모델들의 몇 배수가 되는 횟수로 자기 자신을 그렸다. 자화상이야말로 쉐르벡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놓는다. 보통 화가들이 자화상을 몇 점씩 그린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자화상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단순화되어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핀란드의 뭉크’라는 별명을 가진 이유도 짐작된다. 그녀는 자기 얼굴을 최후의 제물로 삼았다. 단순화에 바쳐진 작가의 일생은 말년 자화상에 이르러 하나의 상형문자로 승화했다고 평론가들은 전하고 있다. 늙고 병들어 쪼그라드는 그녀의 얼굴은 눈동자 같은 것을 표현할 겨를도 없이 움푹 팬 공간으로 눈의 위치만을 겨우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래도 콧날만은 여전히 중심에 우뚝 서 일말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켜내고 있다. 운명하기 1년 전의 자화상에서 놀란 듯이 크게 벌어져 있던 입 모양이 운명의 그해 마지막 자화상에서는 어떤 다짐처럼 꾹 다문 채 멈춰 서 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이 공포까지도 그대로 수용한 채 꼼꼼히 기록되고 있다. 눈 녹듯 희미하게 뭉개져 버리는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그녀는 잔인한 외침을 쉬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섬뜩하게 슬프고도 처연하게 아름다운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작가의 응시와 기록은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를 위로한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
상파울루 대학 현대미술관(MAC-USP)은 모딜리아니, 샤갈, 피카소, 미로, 칸딘스키, 키리코, 에른스트 등 이름도 화려한 전 세계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소장하고 있지만, 브라질 미술계에 ‘근대’를 선언함과 동시에 ‘여성’으로 등장한 아니타 말파치의 존재는 저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의 이름을 잠시 커튼 뒤로 물리게 한다. 그의 자화상 <바보>(1916)를 보자. 치켜뜬 눈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다. 약간 뒤틀린 코의 위치에서는 자조적 요소가 묻어난다. 강렬한 노랑과 빨강과 초록의 과감한 사용은 자아와 세계의 팽팽한 대결을 말하는 듯도 하다. 불규칙적으로 쓰인 검은 윤곽선이 이러한 긴장을 배가시킨다. 아니타 말파치는 브라질 모더니즘 1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1922년 '현대 미술 주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작품을 선보였다. 1889년 12월 2일 상파울루에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독일계 미국인 화가였고, 아버지는 이탈리아인 엔지니어였다. 오른팔에 선천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탓에 위축을 교정하기 위해 세 살 때 큰 수술을 받았으나 평생 팔의 움직임이 썩 자유롭지 못했다. 10대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언어 및 회화 교사로 일하기 시작한 어머니로부터 그림과 외국어를 배웠다. 작가는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나는 열세 살이었는데, 인생에서 어떤 방향을 취해야 할지 몰라 괴로워했습니다. 아직 아무것도 내 감수성의 깊이를 밝혀주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이상한 경험에 나 자신을 맡기기로 했습니다. 죽음의 감각이 나를 빨아들였습니다. 나를 위험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강한 감정이 나라는 존재를 결정적으로 해독해 주리라 생각했어요. <...> 어느 날 집을 나와 기찻길 침목 밑에 누워 기차가 나를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귀청이 터질 듯한 소음, 공기의 이동, 숨이 막힐 듯한 온도는 내게 섬망과 광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공간을 가로지르는 바로 그 색, 유령이 지나가는 망막에 영원히 고정하고 싶은 색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계시였습니다. 나는 그림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돌아왔습니다,”
브라질 예술에 모더니즘을 선언하다
1910년 대부였던 삼촌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말파치는 베를린으로 떠났고 거기서 표현주의 기법을 터득했다. 독일 쾰른에서 열린 전시회를 방문하여 반 고흐를 비롯한 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유럽의 임박한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불안 가운데 작가는 브라질로 돌아와 1914년 첫 개인전을 열고 표현주의 양식의 영향을 맘껏 펼쳐 보였다. 그러나 보수적인 브라질 평단으로부터 혹평이 쏟아졌고 그녀는 다시 한번 뉴욕으로 떠나 현대 회화 화풍의 실험에 매진했다. 1917년 상파울루로 돌아와 개인전을 여는데 표현주의 성향이 강한 작품 53점을 출품했고, 이 행사는 브라질 모더니스트 운동의 이정표가 된다.
<바보>(1916)는 바로 이때 등장한 작품인데 아카데미즘이 지배적인 상파울루 문화 엘리트의 보수파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전시회를 방문한 비평가가 신문에 <편집증인가 신비주의인가?> 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으며 강하게 비판하자 말파치는 한동안 외부와의 소통을 끊고 고립을 자처할 만큼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시도는 젊은 문인과 시각 예술가들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훗날 스스로를 모더니스트라고 부를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시인이자 음악가인 마리우 지 안드라지 같은 이는 브라질에 당도한 현대미술의 혁명적 도전성을 감지했다. 그렇게 이른바 5인 회(Grupo dos Cinco)가 결성된다. 브라질의 문화적 파노라마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은 야심 찬 그룹이었다. 그러니까 <바보>는 전통 미술과 결별하고 현대적이고 혁신적이며 독립적인 미술을 창조하고자 했던, 브라질에 모더니즘 미학을 처음 알리고자 했던 여성 예술가의 ‘나는 바보로소이다’라는 처참한 고백이자 꺾이지 않는 선언문 같은 작품이었다. 파리와 뉴욕을 거치며 새로운 예술에 눈뜨면서 자신의 한계를 여실히 느낀 이가 감추지 않고 내뱉는 자기 고백. 게다가 자연주의적 재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혹한 비판에 직면한 자의 일그러진 자화상이기도 하지 않은가. 말파치는 이후 과감한 표현력을 상당 부분 상실하고 말았다.
일상적인 대상을 두껍게 요동치는 왜곡된 윤곽선과 선명한 색상으로 그려낸 그녀의 작품들은 소외된 사람들의 상황을 강조하는 도심의 일상적인 장면을 그림으로써 사회적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표현 양식 면에서도 갱신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을 지향한 만큼 정확한 형태에 집착하지 않았고, 이는 전통적인 미적 감각에 태생적으로 도전하는 셈이었던 것. 브라질 여성 아방가르드 화가 맨 앞자리에 아니타 말파치를 놓아본다.
뭉개진 얼굴이 주는 위로
야자수 나라의 그림이 위와 같은 사정을 지녔다면 자작나무 나라의 사정은 이러하다. 헬레네 쉐르벡이란 화가 이야기다. 그녀 역시 문화적 변방에서 여성 화가로서 조국 ‘근대’ 미술의 얼굴이 되었고 주변인,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주로 그렸다. 물론, ‘여름’과 ‘겨울’처럼 이들 삶을 둘러친 생의 커튼은 다른 질감과 채도를 지녔다. 겹겹이 쌓여 침묵에 이르는 이야기의 압축이 그녀의 얼굴 속에 있다.
1862년에 태어나 열한 살에 핀란드미술협회 드로잉스쿨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 그녀가 1879년 <빌헬름 폰 슈베린의 죽음>이라는 작품으로 핀란드 미술협회 상을 받았을 때는 열일곱 살이었다. 당시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열세였던 여성 화가로서 남성 화가들의 텃세가 심했던 역사화 부문에서 실력을 입증한 셈이었고, 이듬해 러시아 황실 원로원의 후원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라 파리와 브르타뉴 지방에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고 새로운 회화 기법들을 익히며 자신만의 페인팅 스타일을 구축했다. 매해 핀란드 미술협회에서 주관하는 전시회에 그림을 걸어 소장자를 찾고, 책에 들어갈 삽화를 끊임없이 그리는 방식으로 재원을 확보하던 그녀는 미술협회 한 후원자의 지원으로 영국 여행의 기회를 얻는다. 그때 탄생한 작품 <회복기>는 1889년에 열린 파리박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한다. 이후 1890년대에는 자신이 처음 붓을 잡은 핀란드 미술협회 드로잉스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도 정기적으로 자신의 시간을 할애한다. 헬싱키 근교 소읍 히빈카와 타미사리에서 각각 23년(1902~1925), 16년(1925~1941)을 지내며 화가는 거의 주변 사람들을 그렸다. 어릴 때 사고로 다리를 절었던 그녀는 19세기 핀란드 시골의 가부장적이고 폐쇄적인 환경 속에서 독특한 색감의 그림을 통해 스스로의 영혼을 해방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모더니스트적인 면모를 갖추게 된 때가 바로 이 시기이다.
19세기 태어나 그림을 익혔던 화가는 20세기로 넘어오면서 세기적 현상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실물과 유사하게 그리는 전통적 인물 표현 기법을 철회하고 그 인물됨의 핵심을 파악해 점차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대상은 점점 나이 들지만, 화가의 붓질은 점점 젊어진다. 동일 인물을 애정을 가지고 오랜 기간 반복해서 그리는 것의 매력이 충분히 느껴진다. 그리고 그 모델들의 몇 배수가 되는 횟수로 자기 자신을 그렸다. 자화상이야말로 쉐르벡을 독보적인 존재로 만들어놓는다. 보통 화가들이 자화상을 몇 점씩 그린다고는 하지만 그녀의 자화상 숫자는 상상을 초월한다. 단순화되어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핀란드의 뭉크’라는 별명을 가진 이유도 짐작된다. 그녀는 자기 얼굴을 최후의 제물로 삼았다. 단순화에 바쳐진 작가의 일생은 말년 자화상에 이르러 하나의 상형문자로 승화했다고 평론가들은 전하고 있다. 늙고 병들어 쪼그라드는 그녀의 얼굴은 눈동자 같은 것을 표현할 겨를도 없이 움푹 팬 공간으로 눈의 위치만을 겨우 확인시켜줄 뿐이다. 그래도 콧날만은 여전히 중심에 우뚝 서 일말의 자존감을 끝까지 지켜내고 있다. 운명하기 1년 전의 자화상에서 놀란 듯이 크게 벌어져 있던 입 모양이 운명의 그해 마지막 자화상에서는 어떤 다짐처럼 꾹 다문 채 멈춰 서 있다. 죽음 앞에 선 인간의 무력감이 공포까지도 그대로 수용한 채 꼼꼼히 기록되고 있다. 눈 녹듯 희미하게 뭉개져 버리는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라고 그녀는 잔인한 외침을 쉬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섬뜩하게 슬프고도 처연하게 아름다운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작가의 응시와 기록은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를 위로한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