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안중근의 갈등과 딜레마...어둠 속에서 빛을 품고 나아간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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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하얼빈> 리뷰
꽁꽁 얼어붙은 두만강 위를 위태롭게 걷고 있는 남자. 며칠을 굶고 걷기만 한 남자는 이내 얼음 바닥 위로 쓰러진다. 눈보라가 거세지면서 남자의 눈썹 위로 눈이 쌓인다. 태아처럼 누워 코트의 옷깃을 부여잡고 있는 남자. 남자의 눈앞에는 아직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얼음길이 남아있다.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눈부신 얼음 강 위를 혼자 힘겹게 걷고 있는 안중근을 비추며 시작된다. 역시 안중근 의사를 주인공으로 했던 영화 <영웅> (윤제균, 2024) 이 그와 동료들의 결의 넘치는 독립 맹세를 그리며 전개된다면 <하얼빈>은 안중근의 외로운 여정으로 전개가 되는 것이다. 확연하게 다른 두 영화의 오프닝은 이 영화들의 결정적인 차이점이기도 하다. <영웅>은 제목 그대로 안중근의 영웅적인 행보와 업적을, <하얼빈>은 청년 안중근의 갈등과 딜레마에 방점을 둔다.
영화는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3년이 지난 1908년을 배경으로 한다. 안중근(현빈)과 독립군들은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벌어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둔다. 안중근은 동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생포된 일본 군인들을 풀어주고, 이 중 한 일본 장교는 남은 군인들과 함께 안중근의 부대를 몰살한다. 자신의 판단에 의해 부대원들을 모두 잃게 된 안중근은 큰 실의에 빠진 채 구사일생으로 독립군들의 기지로 돌아오지만, 그들은 안중근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안중근은 이들을 설득해 일제를 소탕하기 위한 더 큰 대사를 공모한다.
1년 후 안중근은 동료들인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최재형(유재명), 이창섭(이동욱) 등과 함께 모여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이들 중 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작전 내용은 모두 일본군에게 전달되고,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안중근은 밀정을 역이용해 먼저 하얼빈에 당도하는 데 성공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하얼빈>은 매우 다른 종류의 ‘안중근’ 영화다. 안중근을 다룬 영화는 해방 직후인 1946년에 개봉한 이구영 감독의 <의사 안중근>을 필두로 전창근 감독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1959), 주동진 감독의 <의사 안중근> (1972) 등 거의 모든 시대에서 한두 편씩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빈번히, 그리고 다양한 창작자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뮤지컬 영화의 형태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최근 제작된 <영웅>을 포함 과거의 안중근 영화들은 비교적 공통적으로 안중근의 영웅적인 면모, 즉 그의 성품과 업적을 신화적으로 그리는 경향을 보였다. 물론 이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만 영화적인 맥락에 있어서는 다소 천편일률적인 접근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하얼빈>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면 같은 영웅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맹목적인 인물의 재현을 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얼빈>은 영웅 안중근이 아닌, 젊은 군인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향하기까지의 2년여의 세월과 그 사이에 벌어진 여러 가지 시행착오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안중근과 동료들의 크고 작은 희생들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이들은 나라를 구하고자 모인 독립군들이기도 하지만 “결혼이나 해서 소소하게 살고 싶은” 젊은이들이기도 한 것이다. <하얼빈>에서 비춰지는 안중근은 이렇게 목숨을 걸고 모인 이들보다 더 뛰어나지 않다. 이들은 같은 목표와 희망을 가지고, 비슷한 정도의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운명 공동체다.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염원과 안중근의 고귀한 희생으로 인해 거사가 행해진 것이다. 홍경표 감독의 촬영 역시 영화의 이러한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부감 (bird’s eye view) 으로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를 포함해 영화의 촬영은 특정 인물을 상찬하지 않는다. 화려하고 밝은 클로즈업을 지양하는 대신, 영화는 한 걸음 뒤에서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공간에 주목한다. 결과적으로 주인공인 안중근을 포함한 메인 캐릭터들은 빛보다는 어둠으로, 조명보다는 그림자로 비춰지게 된다.
마치 느와르를 연상 시킬 정도로 어둡고 감각적인 촬영은 <하얼빈>의 하얼빈 거사 시퀀스를 더욱 인상적으로 남게 한다. 마치 클라이맥스의 프리마돈나를 비추듯, 하얼빈에서 마침내 적을 마주하는 안중근은 어둠을 강조했던 영화의 전반과는 반대로 밝은 빛을 품고 등장한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외치는 “카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의 러시아어 표현) 는 그러기에 더더욱 경이롭고 숭고하게 느껴진다. <하얼빈>은 빛과 어둠의 영화다. 이는 비단 영화의 촬영과 조명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영화는 어둠에 머물고 있던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마침내 빛을 가져다 다 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정말로 잘 만들어진 ‘영웅 서사극’이자 상업 대작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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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
1년 후 안중근은 동료들인 우덕순(박정민), 김상현(조우진), 공부인(전여빈), 최재형(유재명), 이창섭(이동욱) 등과 함께 모여 러시아와 협상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그가 알지 못했던 것은 이들 중 밀정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작전 내용은 모두 일본군에게 전달되고,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안중근은 밀정을 역이용해 먼저 하얼빈에 당도하는 데 성공한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하얼빈>은 매우 다른 종류의 ‘안중근’ 영화다. 안중근을 다룬 영화는 해방 직후인 1946년에 개봉한 이구영 감독의 <의사 안중근>을 필두로 전창근 감독의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 (1959), 주동진 감독의 <의사 안중근> (1972) 등 거의 모든 시대에서 한두 편씩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빈번히, 그리고 다양한 창작자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뮤지컬 영화의 형태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최근 제작된 <영웅>을 포함 과거의 안중근 영화들은 비교적 공통적으로 안중근의 영웅적인 면모, 즉 그의 성품과 업적을 신화적으로 그리는 경향을 보였다. 물론 이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만 영화적인 맥락에 있어서는 다소 천편일률적인 접근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하얼빈>의 가장 큰 차별점이라면 같은 영웅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맹목적인 인물의 재현을 피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얼빈>은 영웅 안중근이 아닌, 젊은 군인 안중근이 하얼빈으로 향하기까지의 2년여의 세월과 그 사이에 벌어진 여러 가지 시행착오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안중근과 동료들의 크고 작은 희생들에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보이는 이들은 나라를 구하고자 모인 독립군들이기도 하지만 “결혼이나 해서 소소하게 살고 싶은” 젊은이들이기도 한 것이다. <하얼빈>에서 비춰지는 안중근은 이렇게 목숨을 걸고 모인 이들보다 더 뛰어나지 않다. 이들은 같은 목표와 희망을 가지고, 비슷한 정도의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운명 공동체다. 궁극적으로는 이들의 염원과 안중근의 고귀한 희생으로 인해 거사가 행해진 것이다. 홍경표 감독의 촬영 역시 영화의 이러한 철학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얼어붙은 두만강을 부감 (bird’s eye view) 으로 보여주는 오프닝 시퀀스를 포함해 영화의 촬영은 특정 인물을 상찬하지 않는다. 화려하고 밝은 클로즈업을 지양하는 대신, 영화는 한 걸음 뒤에서 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과 공간에 주목한다. 결과적으로 주인공인 안중근을 포함한 메인 캐릭터들은 빛보다는 어둠으로, 조명보다는 그림자로 비춰지게 된다.
마치 느와르를 연상 시킬 정도로 어둡고 감각적인 촬영은 <하얼빈>의 하얼빈 거사 시퀀스를 더욱 인상적으로 남게 한다. 마치 클라이맥스의 프리마돈나를 비추듯, 하얼빈에서 마침내 적을 마주하는 안중근은 어둠을 강조했던 영화의 전반과는 반대로 밝은 빛을 품고 등장한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외치는 “카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의 러시아어 표현) 는 그러기에 더더욱 경이롭고 숭고하게 느껴진다. <하얼빈>은 빛과 어둠의 영화다. 이는 비단 영화의 촬영과 조명만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영화는 어둠에 머물고 있던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마침내 빛을 가져다 다 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정말로 잘 만들어진 ‘영웅 서사극’이자 상업 대작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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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정 영화평론가·아르떼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