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클래식 음악 연대기에서 거장 연주자들의 발자취를 되새길 때, 작곡 분야에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름은 당연히 진은숙이다. 그의 업적은 헤아릴 수 없는 광활한 은하수와 같다.
작곡가 진은숙
작곡가 진은숙
진은숙은 동시대 작곡가로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예로운 상을 받은 주인공이다. 일본 도쿄도 150주년 기념 국제 작곡 콩쿠르(1993) 작품상, 부르주 국제 전자음악 작곡 콩쿠르 1위(1999), 가우데아무스 작곡 콩쿠르 1위(1985), 그라베마이어상(2004), 아르놀트 쇤베르크 음악상(2005), 하이델베르크 여성 작곡가상(2007), 시벨리우스 음악상(2017), 함부르크 바흐상(2019), 레오니 소닝 음악상(2021), 에른스트 폰 지멘스상(2024) 이외에도 많다.

베를린 필하모닉에서는 그녀의 작품만 연주한 음반 세트를 발매했다. 서울시향과 ‘아르스 노바’ 시리즈로 동시대 음악의 거리를 좁히고, 2022년부터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을 맡아 축제를 더욱 발전시킨 진은숙. 그 업적은 너무나 광활한 은하수 같지만, 그녀가 걸어온 길을 일부라도 살펴본다.

헤아릴 수 없는 수상기록의 주인공

진은숙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클래식 음악과 피아노를 처음 접한 건 목사인 아버지의 교회에서였다. 어려서 너무나 갖고 싶었던 전축을 언니 진회숙(음악평론가)과 방송국 노래자랑대회 상품으로 얻었고, 베토벤과 브람스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했다. 14~15세 무렵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을 접하고 대학 시절 유럽 현대음악을 듣게 된다.

진은숙은 금란여중 재학 시절 피아니스트가 되기로 결심했다. 피아노를 독학하던 중 음악 선생님인 조환기로부터 작곡가가 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고, 13세에 작곡하는 길로 들어섰다. 이 시절 경제적 사정이 어려워 악보를 살 형편이 되지 않았다. 차이콥스키, 스트라빈스키 등 작곡가들의 교향곡과 관현악곡 악보를 베끼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6번 ‘비창’ 악보를 음악 선생님께 빌려 몇백 장씩 모사하곤 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에서 만난 은사 강석희 교수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음악을 작곡했고, 세계 현대음악협회 부회장을 지냈다. 서울대 교수에서 정년퇴직 후 ‘새로운 예술의 해’ 집행위원장을 맡았고, 일본 산토리 음악 재단이 선정한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곡가 22인’에 선정된 한국 현대음악의 거목이다.

이후 진은숙은 1985년 독일 함부르크에서 1988년까지 조르지 리게티에게 배웠다.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 작곡가 리게티는 아방가르드와 전자음악, 신낭만주의 음악을 펼친 20세기의 거장이었다. 진은숙은 리게티를 존경했지만, 종종 예측불허의 말과 행동을 하는 까다로운 스승이었다고 말한다. 리게티 앞에서 처음 3년 동안 한 곡도 쓰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중에 서서히 그 내공이 올라오게 된다.
작곡가 진은숙 / 사진. ©구본숙
작곡가 진은숙 / 사진. ©구본숙
1988년부터 독일 베를린으로 본거지를 옮긴 그녀는 베를린 공과대학에서 전자음악 스튜디오 작곡가로 활동한다. 몇 년 동안 전자음악 작곡을 시도하며 7곡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같은 스타일에 머물지 않았다. 이후엔 전자음악 전문 작곡가와는 다른 길을 걸었다. 1990년 진은숙의 첫 오케스트라 작품이자, 3명의 여성 성악가와 여성 합창단, 오케스트라를 위한 ‘트로이 여인들(Die Troerinnen)’을 베르겐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했다. 이듬해인 1991년에는 출세작으로 평가받는 ‘아크로스틱 말장난’이 초연된 뒤 아시아, 유럽, 북미 등 세계 15개국에서 연주됐다.

진은숙은 지난 10~20년 동안 느낀 동시대 음악의 트렌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유럽에 와서 처음 공부할 때인 1980년대만 해도 유럽 아방가르드 슈톡하우젠·불레즈·노노 등이 몇십 년 동안 헤게모니를 잡고 있어서 그들의 자장 안에서 음악계가 움직였지만, 1990년대부터 그들이 퇴장하면서 많이 풀어진 상태가 됐다.” 즉 주된 스타일이 없고 수많은 스타일이 공존하는 이 시기를 두고 “유러피언 아방가르드의 독트린이 무너진 것”이라 진은숙은 설명한다. 독일 같은 나라는 아직도 아방가르드를 신봉하고 있지만, 독일이 유럽의 전부는 아니라고 그는 덧붙인다.

유럽에서 쌓아올린 현대음악의 금자탑

진은숙은 2001년부터 2002년에 걸쳐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의 상주 작곡가가 됐다. 당시 상임지휘자인 켄트 나가노와 함께 2002년 바이올린 협주곡, 2007년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2008년 ‘로카나’ 등 다섯 곡을 세계 초연했다. 2004년 진은숙의 그라베마이어상 수상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세계 속에 나부끼게 했다. 20만 달러의 상금이 주어지는 이 상은 동시대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의 최고 영예로 손꼽힌다.

그도 그럴 것이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1985년 수상), 조르지 리게티(1986), 해리슨 버트위슬 경(1987), 존 코릴리아노(1991),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1992), 다케미쓰 도루(1994), 존 애덤스(1995), 탄둔(1998), 토머스 아데스(2000), 피에르 불레즈(2001), 카이야 사리아호(2003) 등 수상자의 면면이 현대음악의 거장들과 동의어였기 때문이다.

이 그라베마이어상을 안겨준 진은숙의 작품인 바이올린 협주곡은 발리의 가믈란 음악에서 영감을 받았다.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가 한 악기처럼 연주되는 것이 특징이다. 바이올리니스트 비비아네 하그너를 솔로이스트로 기용해 2002년에 초연했다. 2005년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의 바이올린,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이 다시 한번 연주한 뒤 세계 각국에서 연주되었다.

진은숙은 연주자가 작곡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밝힌 바 있다. 젊을 땐 누구를 염두에 두지 않고 곡을 썼지만, 이 바이올린 협주곡 등에서 비비아네 하그너와 작업하면서 ‘누가 연주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전했다. 첼리스트 알반 게르하르트도 마찬가지. 연주자가 연주하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 감동을 통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영감을 얻는다. 인간적인 면, 감정적 차원의 표현이 작곡가에게 전하는 바가 크다고 했다.
작곡가 진은숙 / 사진출처. © Berliner Philharmoniker
작곡가 진은숙 / 사진출처. © Berliner Philharmoniker
2007년 켄트 나가노가 지휘봉을 잡고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된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도 화제가 됐다. 현지 언론은 “진은숙의 정제된 구성, 그리고 나가노의 명수다운 컨트롤과 감탄할 만한 정확성으로, ‘앨리스’의 스코어는 밝고 투명하게 빛났다”고 평했다.

오페라 ‘다크 사이드’로 다시 비상

2005년 서울시향이 재단법인으로 새출발하고 진은숙은 상임 작곡가로 부임했다. 2006년부터 13년 동안 이어진 ‘아르스 노바’ 시리즈는 한국 음악사에 빛나는 금자탑이다. 새로운 예술이란 뜻의 ‘아르스 노바’는 현대음악 연주회와 마스터클래스로 구성돼 우리나라의 청중, 연주자, 작곡가에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던 청중도 음악 감상의 맷집을 키우고 저마다 교감의 그릇을 넓혔다. 신동훈 등 차세대 작곡가들이 마스터클래스를 거쳐 탄생했다.

진은숙은 정명훈이 지휘한 서울시향의 음반으로도 빛났다. 김선욱 협연 피아노 협주곡, 알반 게르하르트 협연 첼로 협주곡, 우웨이 협연 생황 협주곡이 수록된 정명훈 지휘 서울시향의 음반(DG)이 국제 클래식 음반상(ICMA) 현대음악 부문을 수상하고, <그라모폰>지의 추천을 받는 등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 것. 서울시향 최고의 음반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완성도를 자랑한다.

진은숙은 “녹음을 열흘 동안 했는데, 정 선생님이 지휘료 한 푼 안 받고 하셨다. 정 선생님급의 지휘자가 열흘 동안 시간을 내서 지휘료 없이 녹음한다는 건 다른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다 해석도 정확해서 감동했다”며 “선욱 군은 녹음한 지 2~3주 뒤에 함부르크로 가서 북독일방송교향악단과 같은 곡을 연주했는데 서울시향과 연주가 더 좋게 들리더라”고 말했다.

2023년 베를린 필은 진은숙의 작품만 담은 음반 세트인 <진은숙 에디션>을 자체 레이블에서 발표했다. 크리스티안 테츨라프와 사이먼 래틀이 선보인 바이올린 협주곡, 알반 게르하르트와 연주하는 첼로 협주곡, 바버라 해니건이 참여한 소프라노와 관현악을 위한 ‘사이렌의 침묵’, 대니얼 하딩이 지휘한 관현악곡 ‘로카나’, 베를린 필 위촉곡 ‘코로스 코르돈’, 김선욱의 피아노와 사카리 오라모의 지휘가 함께한 피아노 협주곡 등이 담겼다.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가 우리나라 작곡가의 작품을 두 장의 시디와 한 장의 블루레이에 담아낸 작품들을 들을 수 있는 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발매한 <베를린 필 진은숙 에디션>, CD 2장과 블루레이, 해설 책자로 구성됐다. / 사진출처. © Berliner Philharmoniker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발매한 <베를린 필 진은숙 에디션>, CD 2장과 블루레이, 해설 책자로 구성됐다. / 사진출처. © Berliner Philharmoniker
진은숙의 작풍은 ‘섬세한 판타지풍’으로 일컫는다. 요즘은 초기처럼 난해하지 않다는 평가다. 한음 한 소리에 깊은 의미가 있어 어느 순간도 순수한 음색이 들리는 것이 특징으로,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이국풍에 의존하지 않고 작곡가의 국적을 느낄 수 없는 악기법이 고도로 안정된 서법으로 발휘되고 있다.

진은숙의 왕성한 창작열은 식지 않는다. 지금은 오페라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을 쓰고 있다. 18년 만의 오페라로, 양자역학을 체계화한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와 심리학자 카를 융의 이야기를 담는다. 곡뿐 아니라 오페라 스토리와 대본까지 진은숙이 직접 다 쓰는 이 작품은 2025년 5월 18일부터 독일 함부르크 오페라에서 켄트 나가노 지휘로 초연한다.

곡을 쓸 때 안 풀리면 피아노 앞에 앉아 바흐 푸가를 친다는 진은숙. “복잡하던 머리가 뚫리는 느낌”이라는 그 호조가 길어졌으면 좋겠다. 길이 남을 그녀의 음악을 더 많은 사람이 듣길 바라는 마음이기에.
작곡가 진은숙 / 사진. ©구본숙
작곡가 진은숙 / 사진. ©구본숙
류태형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