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워크 확대로 협상력 높이고…통상 룰 메이킹 참여해야"
“한국도 자유무역협정(FTA)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중견국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비슷한 수준의 국가들과 협력해야 합니다.”(후카가와 유키코 일본 와세다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

“글로벌 시장 분단에 대비하려면 다층·다면적인 FTA 네트워크가 필수적입니다.”(정하늘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

급변하는 글로벌 통상질서 속에서 한국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한국 경제와 통상 전략에 해박한 내·외부인이 내린 해법은 비슷했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치경제학술원 교수와 정하늘 국제법질서연구소 대표는 새로운 통상질서 속에서 한국은 기존 FTA를 넘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등을 통해 통상 네트워크를 다층화하고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네트워크 확대로 협상력 높이고…통상 룰 메이킹 참여해야"
이들은 한국 제조업이 중국 추격으로 도약이냐 쇠퇴냐의 큰 갈림길에 섰다는 점에서 문제 인식이 같았지만 해법에선 견해가 엇갈렸다. 후카가와 교수는 “한국이 지난 60여 년간 계속해 온 제조업과 수출 중심의 성장 전략을 바꿔야 할 때”라고 제안했다. 반면 정 대표는 “폭넓은 제조 역량과 통상 네트워크야말로 한국이 선진국 대접을 받는 이유”라며 “제조업으로 승부를 거는 게 정석”이라고 했다.

한국경제신문은 지난달 30일과 지난 2일 후카가와 교수와 정 대표를 각각 인터뷰했다. 동일한 질문을 하고 답변을 받아 가상 대담 형태로 정리했다.

▶지정학적인 환경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후카가와 교수=최근 한·일 경제협력과 미래파트너십펀드 활동을 하면서 지난 60여 년간 한국을 지탱해 온 성장 전략이 한계에 다다랐음을 실감했습니다. ‘제조업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체제를 바꿔야 할 때입니다.

▷정 대표=미·중 패권 경쟁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단절됐습니다. 최첨단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전환하는 데 가장 앞장선 미국조차 전통 제조업을 부활시키려는 추세입니다.

▶한국이 성장 전략까지 바꿔야 할까요.

▷후카가와 교수=그렇다고 봅니다. 제조업으로 중국과 경쟁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잖아요. 반도체도 따라잡히는 건 시간 문제죠. 생산능력과 기술자의 양과 질로 한국이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하지 않습니까. 출산율 0.72명인 한국이 14억 명의 인구대국 중국과 경쟁할 수 있을까요.

▷정 대표=한국이 보유한 폭넓고 완결성 있는 제조업 역량이야말로 선진국 대접을 받는 이유입니다. 선진국들은 너무 빨리 탈(脫)제조업화를 이룬 탓에 제조역량을 상실했어요. 독일 제조업도 경쟁력은 인정받지만 만들 수 있는 영역 자체는 엄청나게 줄었습니다. 대부분 상품을 다 만들 수 있는 산업 기반을 갖춘 나라는 한국과 일본, 중국 정도예요.

▶중국의 추격을 뿌리칠 방법이 있습니까.

▷후카가와 교수=한·일 경제협력의 단골 과제로 수소와 희토류 공동 개발 등이 오릅니다만 이 분야도 중국과의 경쟁에서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라고 봅니다.

▷정 대표=인공지능(AI)과 스마트팩토리를 활용하면 중국과 규모의 경제 면에서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될 수 있습니다. AI와 스마트팩토리 분야에서조차 중국이 앞선다는 게 문제지만 충분히 쫓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기능별 AI 앱과 로봇 개발의 선두주자로 평가받는 미국과 중국 기업들은 모두 창업한 지 5년 남짓의 스타트업들이거든요. 빅테크와의 격차는 어쩔 수 없습니다만.

▷후카가와 교수=중국의 추격 앞에 제조업으로는 고용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고용 효과가 큰 산업인 기계공업 조선 석유화학 등의 상황은 비참한 지경이잖아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일컬어지는 반도체 등 지식 집약적 산업은 일자리 창출에 한계가 있고요.

▷정 대표=‘직선주로를 포기하는 대신 곡선주로에서 미국을 추월한다’는 중국의 전략을 역으로 참고할 만합니다. 자동차 분야에서 100년 가까이 뒤진 엔진 대신 전기차로 승부를 건 게 대표적인데요. 기존 시장에서 선진국과 같은 방식으로 조금씩 격차를 줄여나가는 게 직선주로 경주라면 새로운 시장에서 선진국을 단숨에 추월하는 방식이 곡선주로 경주라는 거죠. 제조업 서비스업 할 것 없이 대부분 시장이 곡선주로 경주로 변하고 있습니다.
"네트워크 확대로 협상력 높이고…통상 룰 메이킹 참여해야"
▶통상질서 급변 속에 한국은 무역 비중이 높습니다.

▷후카가와 교수=선진국 가운데 수출 의존도가 40%에 달하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통상으로 먹고산다는 일본의 수출 의존도조차 13~16%에 불과합니다.

▷정 대표=자원 빈국인 한국은 산업과 생활 수준을 유지하려면 수입이 필수적입니다. 수입을 위한 외화는 수출로 벌 수밖에 없고요. 내수를 아무리 키워도 수출입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게 한국 경제의 본질적인 한계입니다.

▶그렇다면 해법은 무엇입니까.

▷후카가와 교수=인구 5000만 명을 넘는 선진국 가운데 한국만큼 내수시장이 빈약한 나라가 없어요. 전통 제조업 시대에 한국은 외국 기술을 도입해 혁신함으로써 경쟁력을 키웠습니다. 디지털 시대인 오늘날은 기술 혁신의 원천조차 내수입니다. 중국이 세계 1위 전기차 생산국이 된 것도 내수 덕분입니다. 물론 한국 인구만으로는 내수와 서비스 시장을 키우는 데 한계가 있으니 일본과 중국 등 주변국 내수시장 일부를 차지하는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정 대표=물론 한국도 서비스와 내수시장을 키워야 하지만 제조업이라는 강점을 희생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조업은 투자에 비례해 성과가 나오는 분야지만 내수와 서비스업은 정책과 투자로 해결되는 부분도 아니고요. 한국의 가장 강력한 승부 기반인 제조업으로 승부를 거는 게 정석 아닐까요.

▷후카가와 교수=한국이 급속히 고령화하고 있기 때문에 제조업으로만 승부를 걸기 어려워질 겁니다. 내수시장을 키워야 하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그러려면 고령자의 소득을 늘려야 합니다. 연금 시스템이 취약한 한국은 고령자층의 소비가 부진하기 때문입니다. 은퇴 세대의 42%가 상대적 빈곤층인 선진국은 없습니다.

▶한국의 통상전략은 어떻게 평가하나요.

▷후카가와 교수=제조업과 수출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은 통상 전략에 투영됩니다. 한국은 FTA를 많이 체결해 관세를 낮추고, 수출을 늘리는 데 주력하느라 글로벌 룰 메이킹(통상 규정 수립)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통상질서는 이미 바뀌고 있는데 한국은 ‘세계 1위 FTA 체결국인 우리나라는 통상 챔피언’이라고 자만하는 것 같습니다.

▷정 대표=세계무역기구(WTO) 체제 붕괴와 글로벌 시장 분단에 대비하려면 다층·다면적인 FTA 네트워크가 필수적입니다. 국제통상법상 WTO가 붕괴한다고 해서 FTA 기능이 정지되지는 않습니다. 촘촘하게 깔아놓은 FTA 네트워크는 WTO 체제가 무너지면 운신의 폭을 넓혀줄 숨구멍이 될 겁니다.

▶선진국 통상 전략 변화 방향과 한국의 갈 길은 무엇입니까.

▷후카가와 교수=선진국의 통상 전략은 첫째가 투자 유치, 둘째는 지식재산권, 산업 데이터 같은 서비스 무역 확대로 바뀌고 있어요. 국제통상 질서를 좌우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중국, 유럽연합(EU) 정도입니다. 일본은 국력이 점점 약해져서 ‘미들파워(중견국)’가 됐음을 인정하고 현실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CPTPP 참여가 대표적입니다. 한국도 FTA에만 집중할 게 아니라 중견국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비슷한 수준의 국가들과 협력해야 합니다.

▷정 대표=한국의 전략은 미국과 중국 시장에 최대한 덜 종속되는 방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단기적으로는 미국의 대중국 무역정책으로 인해 미국 시장에서 줄어들 중국의 점유율을 한국이 최대한 많이 차지하는 것입니다. 환태평양 일대에서 가장 고도화한 다자 FTA인 CPTPP에 참여하면 수출입과 관련해 다양한 특혜를 다층적으로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또 다른 한국의 CPTPP 참여 효과는 뭐가 있을까요.

▷정 대표=한국이 CPTPP에 참여하면 국내총생산(GDP)을 1.7% 늘릴 수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놓치기 어려운 효과죠. CPTPP에 참여하지 않은 중국에 대한 경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도, 반대로 참여한 일본에 경쟁 열위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선택입니다.

▷후카가와 교수=CPTPP 회원국의 GDP 합계는 약 12조달러로 EU보다 규모가 큽니다. 영국 캐나다 호주 등 CPTPP 회원국은 대부분 중견국이면서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 대표=CPTPP에는 다수의 자원 부국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한국이 CPTPP에 가입하면 큰 시장뿐 아니라 자원 확보가 가능합니다.

후카가와 유키코 교수

자타공인 일본 최고의 한국 경제 전문가다. 1983년부터 40년 넘게 한국 경제를 연구했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 등 한국 통상 전문가들과는 20년 가까이 교류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일제 징용공 배상 판결 대응책 발표를 계기로 2023년 3월 설립된 한일·일한 미래파트너십펀드의 일본 측 자문위원장을 맡고 있기도 하다

정하늘 국제법질서硏 대표
한국이 낳은 국제통상 분야의 스타다. 2019년 일본이 한국의 후쿠시마산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면서 벌어진 한·일 국제분쟁에서 역전승을 일궈낸 주역이다. 한국이 1심에서 패소한 데다 위생검역(SPS) 분쟁에서 피소국이 이긴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주목받았다. 2022년 5월 산업부 통상분쟁대응과장을 끝으로 공직을 떠나 국제법 연구 독립기관인 국제법질서연구소를 세웠다

정영효/이슬기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