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랏밥 10년' 전직 서기관이 시원하게 비판한 공직사회 [서평]
요즘 공무원들의 컴퓨터 파일명엔 '과수원' '국수원' 등의 단어가 종종 보인다. 각각 '과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 '국장이 수정을 한 번 지시'했다는 뜻이다. 최근 일련의 사건에서 실무를 담당한 공무원이 잇따라 구속되면서 생긴 현상이다. 책임질 만한 소지가 있는 일은 최대한 맡지 않으려고 하고, 맡더라도 책임 소재를 명확히 남기려는 공무원이 많아졌다.

행정고시 출신 전직 공무원이 쓴 <나라를 위해서 일한다는 거짓말>엔 공직 사회의 민낯이 드러나 있다. 저자 노한동은 행시 합격 후 2013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10년 간 일한 뒤 서기관으로 승진하자마자 사직서를 냈다. 퇴직 후 공직 사회에서 경험하고 관찰한 문제점을 기록하고자 펜을 들었다.

특정 예술인의 지원을 배제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이 저자가 맞닥뜨린 공직사회의 첫번째 민낯이었다. 당시 저자는 문체부 사무관으로 일하다 군 복무를 위해 자리를 잠시 비웠다. 그는 스스로에게 수없이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가 그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블랙리스트에 따라 지원을 배제하라는 지시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아마 그렇지 못했을 것이란 답이 나왔다. 저자가 블랙리스트를 실행한 영혼 없는 공무원이 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입대 시기에 따른 행운 덕분이었다.

공직사회는 블랙리스트를 지시받고 실행할 때도 무기력했지만, 처벌과 조사가 끝난 이후에도 그에 대한 반응을 최대한 자제하는 걸 미덕으로 여겼다. 체념과 냉소에 가까운 침묵이 문체부를 지배했다.

저자는 오늘날 공직사회에 유사한 불안감이 팽배해 있다고 말한다. 산업통상자원부의 월성원전 자료 삭제 사건, 방송통신위원회의 TV조선 재승인 심사 점수 조작 사건 등에서 실무를 담당한 공무원이 잇따라 구속되면서 예민함이 극대화됐다. 휴대폰으로 회의를 몰래 녹음하거나, 업무수첩에 누가 어떤 지시를 했는지 빼곡히 적는 게 공직사회의 일상이 됐다는 설명이다.
'나랏밥 10년' 전직 서기관이 시원하게 비판한 공직사회 [서평]
저자는 공무원 사회의 수직적이고 경직적인 회의 구조를 옛 TV 프로그램 '가족 오락관'의 게임 '고요 속의 외침'에 비유한다. 장관이 주재하는 실·국장 회의는 실국장급 간부들이 주재하는 과장단 회의로 이어지고, 다시 과장은 과원들을 불러 모아 같은 일을 반복한다. '고요 속의 외침'에서 한 사람의 말을 끝에 있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전달하는 사람의 주관이 섞이는 건 불가피하다. 결국 말단 직원은 장관이 정말 뭐라고 말했는지 알기 어렵고 눈치껏 추측해야 한다.

공직 사회 특유의 형식적인 보고서 쓰는 문화도 고발한다. 공무원에게 가장 익숙한 컴퓨터 단축기 중 하나는 자간을 조정하는 'alt+shift+n/w'다. 하나의 단어가 줄을 바꿔 걸쳐 있으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지키기 위해서다. 자간을 조정해도 한 줄에 들어가지 않으면 길이에 맞는 다른 단어라도 대체해야 한다. 아무리 복잡한 사안이라도 단 한 장의 보고서로 상황을 요약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한 장, 한 줄과 같은 형식에 과도하게 집착하느라 정작 보고서 내용엔 재대로 신경 쓰지 못한다는 비판이다.

공직사회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몇가지 개선방안을 제시한다. 그중 하나가 관료의 전문성 강화다. 전문성은 정책의 질을 높이는 데 그치지 않고, 상급자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는 큰 무기가 될 수 있다. 현장에 대한 이해와 탄탄한 논리로 무장한 하급자를 대상으로 제아무리 상급자라고 해도 잘못된 일을 무작정 밀어붙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순환보직 제도의 관행을 개선하고 인사 정책의 불필요한 경직성을 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직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무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한 일종의 르포르타주와 같은 책이다. 퇴사자가 아니라면 쓰기 어려운 직설적이고 과감한 문장들이 곳곳에 실려 있다. 꼭 공무원이 아니더라도 조직의 관료주의에 지친 독자라면 '사이다'를 마신 것처럼 시원한 감정을 느낄 수 있겠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