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첫사랑만 보이나요, 2025년 다시 만나는 '러브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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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김은정의 그 영화 다시 볼 이유
2025년 1월 1일 재개봉한 영화 <러브레터>
아련한 첫사랑 너머 깊은 죽음의 그림자를 느껴
2025년 1월 1일 재개봉한 영화 <러브레터>
아련한 첫사랑 너머 깊은 죽음의 그림자를 느껴
아름다운 겨울 영화의 대표작 '러브레터'가 다시 극장에 걸렸다. 설원에 누운 여인, 설산을 향해 달려가 “오겡키데스카(잘 지내나요)”를 외치는 인물의 모습으로 선명하게 기억되는 작품이다. 이번 재개봉은 영화 제작 30주년 기념으로, <러브레터>를 좋아하는 관객에게는 선물 같은 이벤트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장편 데뷔작 '러브레터'는 1995년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음악,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일본 문화의 국내 유통을 허가하지 않는 상태였고, 1998년 이후 순차적 일본 문화 개방에 맞춰 1999년에야 정식 수입되어 극장에 걸렸다. 그렇게 국내 관객에게 선보이게 된 '러브레터'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 OST가 높은 판매를 기록했으며, 당시 영화 애호가의 방 안이나 멋진 카페엔 '러브레터'의 포스터 액자가 하나쯤 걸려있었다. 많은 사람이 '러브레터'를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이뤄지지 못한 사랑, 첫사랑인 줄도 몰랐던 학창 시절의 풋풋했던 감정을 그린 영화로 떠올린다. 세상을 떠난 연인을 삼 년째 잊지 못하는 여성 히로코는 연인의 과거 주소로 안부 편지를 보낸다. 공교롭게도 그 편지는 동명이인인 여성 이츠키에게 배달되고, 이후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의 이츠키를 회상하는 편지를 주고받는다.
영화는 중학교 한 반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동명이인이기에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로 관객에게 재미와 설렘을 준다. 반 친구들의 놀림은 말할 것 없고, 시험 답안지가 뒤바뀌자 어두운 밤에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서로의 것을 확인했던 순간, 함께 교내 도서실에서 일할 때 남자 이츠키가 읽지도 않을 온갖 책을 대출하며 자기 이름을 맨 앞에 적었던 일들, 남자 이츠키를 좋아하던 다른 여학생을 소개했던 일화 등 이츠키가 기억하는 십여 년 전의 일들이 로맨틱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2025년 다시 보는 '러브레터'는 아련한 첫사랑 너머 깊은 죽음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느끼게 한다. 히로코의 연인 이츠키는 산에서 조난당해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연인의 사망,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상실의 슬픔이 오랫동안 히로코의 일상을 지배한다. 애써 담담한 척하지만, 그녀의 일상은 연인의 죽음 이후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한편, 여성 이츠키에게도 아버지의 죽음이 두려움으로 작동한다. 그녀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는 평범한 감기가 급성 폐렴으로 악화되어 사망했다. 아버지의 병증이 심해지던 날 밤, 폭설로 119는 출동할 수 없었고 할아버지의 등에 업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손쓸 수 없었다. 불현듯 그때의 공포가 떠오르기도 하는 이츠키는 현재 지독한 감기를 앓고 있다. 이츠키의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도 남편이자 아들의 사망은 여전히 또렷한 상처로 남아있다. 이 영화가 제작된 1995년 일본도 그랬다. 1990년대 초 버블 경제의 붕괴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은둔형 외톨이나 오타쿠가 된 젊은이들과 실직한 가장의 자살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다 1995년 1월 한신대지진으로 6000여 명이 사망하고 4만3000여 명이 다치는 자연재해가 벌어졌다.
같은 해 3월엔 사이비 종교였던 옴진리교의 광신도들이 도쿄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해 5000여 명이 심각한 중독으로 쓰러졌다. 경제 위기에 정부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나약했으며, 이웃마저 믿을 수 없는 정신적 고립의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일본은 안전 신화가 깨지고 불안과 공포, 불신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회였다. 그 와중에 '러브레터'가 개봉했다.
물론 이와이 슌지가 한신대지진이나 도쿄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연출한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 사건들의 직후 개봉했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당시 일본 관객이 이 영화를 단순하게 아련한 첫사랑의 이야기로만 볼 수 있었을까. 2025년 1월, '러브레터'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지난해 12월, 1인 2역의 주인공으로 열연한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그뿐인가, 너무도 당연하다 여겼던 법치는 사라졌고, 오늘 우리는 평범한 이웃들을 잃은 비애에 잠겨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히로코는 연인이 조난당했던 그 산 앞에 서 있다. 죽음을 마주 보고 외친다. “잘 지내나요.” 그러나 안부 그다음 말이 더 중요하다. 히로코가 울음을 삼키며 소리치는 말은 “와타시와 겡키데스”, '저는 잘 지내요'다. 아들을 먼저 보낸 이츠키의 할아버지는 과거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체력을 단련한다.
이츠키가 고열로 쓰러진 밤, 그때처럼 폭설이 내리지만 할아버지는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한다. 그때보다 더 최선을 다해, 1초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하기 위해 손녀를 업고 달리고 달린다. 오늘 '러브레터'의 감동은 여기에도 있다. 짙은 어둠 속에 있지만 두려움을 직시하며 한 발 더 내디뎌야 한다.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안아줘야 한다. [영화 <러브레터> 메인 예고편]
김은정 영화평론가
이와이 슌지 감독의 장편 데뷔작 '러브레터'는 1995년에 제작되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는 음악, 애니메이션, 영화 등 일본 문화의 국내 유통을 허가하지 않는 상태였고, 1998년 이후 순차적 일본 문화 개방에 맞춰 1999년에야 정식 수입되어 극장에 걸렸다. 그렇게 국내 관객에게 선보이게 된 '러브레터'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영화 OST가 높은 판매를 기록했으며, 당시 영화 애호가의 방 안이나 멋진 카페엔 '러브레터'의 포스터 액자가 하나쯤 걸려있었다. 많은 사람이 '러브레터'를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로 기억한다. 결혼을 약속했지만 이뤄지지 못한 사랑, 첫사랑인 줄도 몰랐던 학창 시절의 풋풋했던 감정을 그린 영화로 떠올린다. 세상을 떠난 연인을 삼 년째 잊지 못하는 여성 히로코는 연인의 과거 주소로 안부 편지를 보낸다. 공교롭게도 그 편지는 동명이인인 여성 이츠키에게 배달되고, 이후 두 사람은 학창 시절의 이츠키를 회상하는 편지를 주고받는다.
영화는 중학교 한 반에서 남학생과 여학생이 동명이인이기에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로 관객에게 재미와 설렘을 준다. 반 친구들의 놀림은 말할 것 없고, 시험 답안지가 뒤바뀌자 어두운 밤에 자전거 페달을 돌리며 서로의 것을 확인했던 순간, 함께 교내 도서실에서 일할 때 남자 이츠키가 읽지도 않을 온갖 책을 대출하며 자기 이름을 맨 앞에 적었던 일들, 남자 이츠키를 좋아하던 다른 여학생을 소개했던 일화 등 이츠키가 기억하는 십여 년 전의 일들이 로맨틱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2025년 다시 보는 '러브레터'는 아련한 첫사랑 너머 깊은 죽음의 그림자를 선명하게 느끼게 한다. 히로코의 연인 이츠키는 산에서 조난당해 사망했다. 갑작스러운 연인의 사망, 제대로 애도하지 못한 상실의 슬픔이 오랫동안 히로코의 일상을 지배한다. 애써 담담한 척하지만, 그녀의 일상은 연인의 죽음 이후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한편, 여성 이츠키에게도 아버지의 죽음이 두려움으로 작동한다. 그녀가 중학생일 때, 아버지는 평범한 감기가 급성 폐렴으로 악화되어 사망했다. 아버지의 병증이 심해지던 날 밤, 폭설로 119는 출동할 수 없었고 할아버지의 등에 업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더 이상 손쓸 수 없었다. 불현듯 그때의 공포가 떠오르기도 하는 이츠키는 현재 지독한 감기를 앓고 있다. 이츠키의 어머니와 할아버지에게도 남편이자 아들의 사망은 여전히 또렷한 상처로 남아있다. 이 영화가 제작된 1995년 일본도 그랬다. 1990년대 초 버블 경제의 붕괴로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은둔형 외톨이나 오타쿠가 된 젊은이들과 실직한 가장의 자살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러다 1995년 1월 한신대지진으로 6000여 명이 사망하고 4만3000여 명이 다치는 자연재해가 벌어졌다.
같은 해 3월엔 사이비 종교였던 옴진리교의 광신도들이 도쿄 지하철에 독가스를 살포해 5000여 명이 심각한 중독으로 쓰러졌다. 경제 위기에 정부 시스템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은 나약했으며, 이웃마저 믿을 수 없는 정신적 고립의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당시 일본은 안전 신화가 깨지고 불안과 공포, 불신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사회였다. 그 와중에 '러브레터'가 개봉했다.
물론 이와이 슌지가 한신대지진이나 도쿄지하철 독가스 사건을 염두에 두고 이 영화를 연출한 것은 아니다. 공교롭게도 그 사건들의 직후 개봉했을 뿐이다. 그렇더라도 당시 일본 관객이 이 영화를 단순하게 아련한 첫사랑의 이야기로만 볼 수 있었을까. 2025년 1월, '러브레터'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지난해 12월, 1인 2역의 주인공으로 열연한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사망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들렸다. 그뿐인가, 너무도 당연하다 여겼던 법치는 사라졌고, 오늘 우리는 평범한 이웃들을 잃은 비애에 잠겨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히로코는 연인이 조난당했던 그 산 앞에 서 있다. 죽음을 마주 보고 외친다. “잘 지내나요.” 그러나 안부 그다음 말이 더 중요하다. 히로코가 울음을 삼키며 소리치는 말은 “와타시와 겡키데스”, '저는 잘 지내요'다. 아들을 먼저 보낸 이츠키의 할아버지는 과거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체력을 단련한다.
이츠키가 고열로 쓰러진 밤, 그때처럼 폭설이 내리지만 할아버지는 그때와 같은 선택을 한다. 그때보다 더 최선을 다해, 1초라도 빨리 병원에 도착하기 위해 손녀를 업고 달리고 달린다. 오늘 '러브레터'의 감동은 여기에도 있다. 짙은 어둠 속에 있지만 두려움을 직시하며 한 발 더 내디뎌야 한다. 서로를, 그리고 자신을 안아줘야 한다. [영화 <러브레터> 메인 예고편]
김은정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