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지난 시간에는 한국이 해상풍력발전 보급을 위해 바다를 ‘폭탄세일’하다 보니 우리 바다가 난개발되고 있는 상황을 보여드렸습니다.

한국은 ‘개발·운영-제조-금융’으로 이어지는 해상풍력발전의 모든 과정을 외국 기업과 해외 자본에 내주고 있습니다. 태양광 시장을 성급하게 개방했다가 전 국토를 중국산 패널에 잠식당한 일본의 전철을 한국은 바다에서 밟고 있다는 우려가 나옵니다.

6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풍력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 8월 말까지 사업 허가를 받아 해상풍력발전을 개발·운영하는 88개사 중 외국 업체는 48곳으로 55%에 달했습니다. 설비용량 기준으로는 총 29.1GW 중 66%인 19.4GW가 이들 외국 업체 소유입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개발·운영 분야는 노르웨이 국영 에너지 기업 에퀴노르, 덴마크 풍력발전 기업 오스테드 등 북유럽 업체가 주도하고 있습니다. 국내 민간 기업 참여자는 SK에코플랜트, SK이노베이션 E&S, 한화 등 서너 곳에 불과했습니다. 풍력발전 제조 부문의 핵심인 발전터빈 시장에서는 작년 말 민간 발전사 기준 83.4%가 외국 제품이었습니다.

해상풍력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은 외국계가 100% 장악하고 있습니다. 산업은행과 시중은행은 2030년까지 총 9조 원 펀드를 조성해 이 중 90%를 해상풍력에 투입한다는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이 계획이 현실화되어도 국내 금융회사 점유율은 2030년 해상풍력 PF 시장(90조 원)의 10% 수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됩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국내 해상풍력발전 시장을 급성장시키기 위해 20~30% 싼 중국 자본을 활용할 것인가, 다소 비싸더라도 우리 기술과 산업을 활용할 것인가. 국내 해상풍력발전 시장에 밀려 들어오는 중국 자본은 우리나라에 이 같은 양자택일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현재 0.125GW 규모인 해상풍력 시장을 2030년 100조 원(14.3GW), 2036년 188조 원(26.7GW)대로 키울 계획입니다.

중국 자본을 활용하자는 사업자들은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만큼 값싼 중국산을 적극 채용해 경제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국과 일본, 유럽연합(EU)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는 중국은 한국만큼은 놓칠 수 없는 시장이라고 판단하고 국내 사업자들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고 있습니다.

국내 민간 발전사 관계자는 “터빈을 2개 구입하면 1개를 끼워주는 ‘2+1’을 제안하거나 해저케이블 가격을 한국산의 70%에 맞춰주겠다는 곳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정부와 대부분의 사업자는 중국 의존도를 높이는 것이 소탐대실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동의했습니다. 자칫 국내 해상풍력 관련 산업 전체를 통째로 중국에 넘겨줄 수 있어서입니다. 중국은 한 번 해상풍력 사업을 따내면 ‘개발·운영-제조-금융’의 전 주기를 자국 산업과 자본으로만 구성하기 때문입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해상풍력 사업비에서 발전 터빈과 전선이 차지하는 비중만 각각 35%와 15%”라며 “우리 스스로 35조 원과 15조 원 규모의 발전 터빈과 전선 산업을 키울 기회를 줘버리는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풍력발전기를 생산하는 데는 철강, 해상풍력 건설사업에는 해상풍력설치선박(WTIV)이 필요합니다. 철강은 중국의 저가 공세로 경쟁력이 약화됐습니다. WTIV는 한국 조선업계가 세계 1위를 지키는 분야입니다. 해상풍력 시장을 중국에 내주면 철강 조선 같은 연관 산업까지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을 것이라고 산업계가 우려했습니다.

문제는 우리 시장을 지킬 수단이 마땅찮다는 점입니다. 발전타워와 전선 같은 비핵심 제조산업을 제외하면 해상풍력 산업의 주도권이 이미 해외에 넘어갔기 때문입니다. 올 8월 말 기준 88개 해상풍력 개발·운영권의 66%(발전용량 기준)를 해외 자본이 소유하고 있습니다. 국내 발전 공기업 몫은 9개로 10%에 불과했습니다.

에너지 공기업들도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는 산업인 해상풍력의 비중을 늘리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채비율을 엄격하게 관리하는 공공기관운영법에 발목이 잡혀 있습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허종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공기업이 프로젝트파이낸싱(PF)을 통한 금융 조달을 할 때 부채비율이 늘어나는 부담을 어떻게 해소할지가 관건”이라고 말했습니다.

풍력발전기의 핵심 설비인 발전 터빈 분야에서 국내 양대 제조사인 두산에너빌리티와 유니슨의 점유율은 28%에 불과합니다. 세계 풍력발전 터빈 시장의 추세가 15㎿급으로 대형화하면서 국산 터빈은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두산에너빌리티와 유니슨의 기술력이 4㎿급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새로 채택된 발전기 터빈만 놓고 보면 국내 제조사 점유율은 17%로 더 줄어들었습니다.

가장 심각한 분야는 외국계가 독점하는 금융 부문입니다. 발전사업자들은 자기자본 10%와 PF 대출 90%로 해상풍력 사업의 자금을 조달합니다. 2030년까지 우리나라에서 90조 원 규모 해상풍력 금융시장이 열릴 것으로 예상되지만, 국내 연기금은 경험 부족과 리스크를 이유로 투자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올해 4월 산업은행과 시중은행이 2030년까지 9조 원 규모의 신재생에너지펀드를 결성해 90% 이상을 해상풍력에 투자하기로 했지만, 전체 시장의 10%에도 미치지 못할 전망입니다. 에너지업계 관계자는 “사업비가 8조~10조 원인 가덕도신공항과 달빛고속도로 건설에는 혈세 낭비 논란이 뜨거운데, 100조 원짜리 시장이 해외로 넘어가는 것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국의 해상풍력 발전 사업이 외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중국 기업들이 한국에서 구축한 해상풍력사업을 기반으로 미국 풍력발전 시장에 진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어서입니다.

에너지업계에 따르면,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주요 선진국은 중국 해상풍력 기자재업체의 자국 진출을 원천적으로 막고 있었습니다. 미국 정부는 2022년 페이스북(현 메타)이 캘리포니아주와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 사업 수주를 위해 중국 차이나모바일과 컨소시엄 구성을 추진하자, 중국 기업을 배제해야 한다고 페이스북에 요구했습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당시 페이스북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초고속으로 처리할 수 있는 해저케이블을 구축하기 위해 여러 중국계 기업과 협력하는 방안을 논의했지만, 미국 정부의 반대로 모두 무산됐습니다. 지난 2월에는 EU집행위원회가 EU 지역 해저케이블 인프라 사업에서 중국 화웨이, ZTE 등 ‘고위험 사업자’를 단계적으로 퇴출해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미국과 EU가 해상풍력 사업에서 중국계 기업을 배제하는 것은 안보에 위협이 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분석됩니다. 안보 전문가들은 해상풍력 발전으로 생산된 전기를 육상으로 전송하기 위해 해저케이블을 매설하는 단계에서 파악된 지형 정보가 중국 정부에 넘어갈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일부 전문가는 군사훈련 지역과 잠수함 이동 동선 등 민감한 군사 정보도 중국 정부가 파악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국의 해상풍력 시장에는 이런 규제가 전혀 없습니다. 업계에서는 “중국이 미국 등에 우회 진출하기 위해 한국 시장에 뛰어들고 있다”는 우려도 나옵니다. 한국 기업과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한국 내 법인을 통해 미국 등으로 수출하는 것 등이 대중국 제재를 우회할 방안으로 거론됩니다.

배터리와 전기자동차 분야에서는 비야디(BYD) 등 중국계 기업이 한국과 합작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미국 정부는 이런 협력이 대중국 제재를 회피하기 위한 편법이 될 수 있다고 의심합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통상당국 고위 관계자는 “미국은 동맹국에도 중국산 해저케이블을 쓰지 않도록 규제하고 있는데, 한국만 이런 규제에서 빠져 있다”며 “중국이 한국 지역에서 얻은 데이터를 군사 목적으로 사용할 가능성도 걱정되는 대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일본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고 직후 원전 가동을 전면 중단했습니다. 전체 전력의 20% 이상을 생산하던 원전을 대체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눈을 돌린 발전원이 태양광이었습니다. 풍력발전은 환경영향평가와 건설에만 10년이 걸리고 건설비도 막대했지만, 태양광 발전은 값싸고 신속하게 원전을 대체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일본 정부는 정해진 가격에 전기를 사주는 고정가격매수제도(FIT)를 2012년 도입하는 등 태양광 발전을 적극 보급했습니다. 이 결과 2022년 전체 전력에서 태양광이 차지하는 비중이 9.2%까지 치솟았습니다. 일부 재가동을 시작한 원전(5.5%)의 두 배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정부가 태양광 시장을 키우는 데 급급한 사이, 일본 태양광산업은 고사 상태에 빠졌습니다. 값싼 중국산 태양광 패널이 일본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기 때문입니다. 2021년 1월 일본을 대표하는 태양광 패널 생산업체인 파나소닉이 생산 중단을 결정했습니다.
"100조 시장 통째로 넘어갈 판"…무관심하던 韓 '비상사태' [정영효의 산업경제 딱10분]
일본 신에너지·산업기술종합개발기구(NEDO)에 따르면, 2001년 일본 태양광 패널의 세계 시장 점유율은 40%에 달했지만 2012년 9%, 2018년에는 1.2%까지 추락했습니다. 중국은 일본 시장을 발판 삼아 세계 1위로 올라섰습니다. 2023년 말 기준, 중국 5대 태양광 패널 제조사의 세계 점유율은 59.3%에 달했습니다.

태양광 사례를 교훈 삼아 일본은 2020년부터 추진하는 해상풍력 사업에서 자국 산업 보호를 우선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계 시장의 44.2%를 차지한 중국의 공세로 시장을 지키는 데 애를 먹고 있습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