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조사 → 원가 파악 및 마진율 설정 → 판매가 확정. 일반적인 유통·제조업체들은 이런 과정을 거쳐 상품 가격을 정한다. 충분한 이윤을 남기기 위해 재료비, 인건비 등 원가를 반영하고, 마진을 더해 판매가를 결정한다.
하지만 최근 이같은 가격 설계 공식이 깨지고 있다. 판매가를 먼저 정한 뒤, 이를 넘기지 않도록 원가와 마진율을 거꾸로 맞추는 ‘가격 역(逆)설계’가 유통업계의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고물가와 불경기의 장기화로 소비 침체가 심화하자 상품 가격을 10원, 100원이라도 낮추려는 기업들의 고육지책이다.
○대형마트·편의점도 ‘다이소’처럼
6일 업계에 따르면 대형마트, 편의점 등 유통업체들은 최근 자체브랜드(PB) 기획 단계에서 가격 역설계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이랜드 킴스클럽이 지난해 초 내놓은 즉석조리식품 ‘델리바이애슐리’가 대표적이다. 킴스클럽은 일본 마트에서 델리 식품을 100~300엔대에 판매하는 것에서 착안해 소비자의 심리적 가격저항선을 ‘3990원’으로 설정했다. 기존 상품 설계 방식대로라면 8000원대에 팔아야 하지만, 목표가를 맞추기 위해 식재료 통합 매입 등을 통해 원가를 낮추고 마진도 줄였다. 파격적인 가격 덕분에 델리바이애슐리는 출시 9개월 만에 판매량 300만 개를 돌파했다.
이같은 상품 기획 방식은 원래 일본 100엔샵, 미국 달러샵, 한국 다이소처럼 균일가 생활용품점이 주로 쓰는 방식이다. 1000원, 3000원, 5000원 등 소비자 판매가를 균일화한 뒤 재료비, 각종 비용, 마진율을 여기에 맞춘다. 이렇게 하면 상품 한 개당 마진은 줄어들지만, 소비자 체감 물가는 낮아져 한 사람당 상품을 더 많이 사게 된다. 킴스클럽 관계자는 “3990원 델리 식품이 워낙 저렴하다 보니 1개 사려다 2개 사고, 2개 사려다 3개를 사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가격을 맞추기 위해 기존엔 안 팔던 ‘B+급 상품’도 등장했다. 롯데마트는 원래 개당 크기가 27㎜ 이상인 체리만 팔았는데, 최근 기준을 24㎜로 완화했다. 그 대신 100g당 가격을 기존 대비 25% 낮췄다. 바나나 최소 판매 규격도 한 송이당 5~7개에서 3~5개로 바꾸고, 일반 상품 가격 대비 50% 낮게 설계했다. 편의점 이마트24는 최근 ‘업계 최저가’를 목표로 정한 뒤 가격 역설계 방식으로 1900원짜리 PB 김밥을 선보였다.
○소비침체 넘어 소비절벽
일부 업체들만 썼던 방식이 대형마트, 편의점 등의 주요 전략으로 자리잡은 건 소비침체를 넘어 소비절벽 상황이 현실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고물가에 최근 정치적 혼란, 무안 제주항공 참사까지 겹치면서 소비심리는 바닥에 다다랐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88.4로, 2022년 11월 이후 가장 낮았다. 지수가 100보다 크면 소비자의 기대심리가 장기 평균(2003~2023년)보다 낙관적이고, 100보다 작으면 비관적이라는 의미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유통업계가 ‘초저가 전략’에 힘을 쏟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 대형마트 관계자는 “소비 심리가 괜찮을 때는 소비자들이 가격 이외에 품질, 디자인 등을 보고 제품을 사지만 최근엔 가격이 구매 결정에 있어 최우선적인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선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