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영감과 섬광] 새해에 생각하는 교양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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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시인·문학평론가
꽤 오래된 일이다. 서울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내를 만났다. 남루한 매무새로 손을 내미는 나이 쉰쯤 되는 사내가 요구한 것은 5000원이었다. 잠시 관찰해 보니, 그는 적은 돈은 거절하고 큰돈에는 거스름돈을 내주고 딱 5000원만 챙겼다. 그가 어떤 기준으로 구걸 액수를 5000원으로 정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태도는 어딘지 이상했다. 자주 타는 지하철 노선에서 그를 여러 번 만났는데, 그의 태도에서 비굴이나 무례함을 발견한 적은 없었다. 승객이 거절하면 조용히 물러나는 사내를 보았을 때 내 뇌리를 스친 것은 엉뚱하게도 교양이라는 단어였다.
식견과 분별이라는 측면에서 교양은 옛사람이 말하는 ‘도(道)’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장자 외편 ‘거협편’의 큰 도둑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그런 생각은 단단해진다. 도척의 무리가 도척에게 “도둑에게도 도가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도척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엔들 도가 없겠는가? 방 안에 감추어진 걸 잘 맞히는 것은 성(聖)의 경지요, 먼저 앞장서 들어가는 것은 용(勇)의 경지요, 가장 뒤에 나오는 것은 의(義)의 경지요, 도둑질이 성공할지 못 할지를 아는 것은 지(知)의 경지요,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仁)의 경지라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하고서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없었다네.” 도둑에게 도가 있다는 장자의 말은 우습기도 했지만 허가 찔린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면 걸인에게는 걸인의 도가 있을 테고, 지하철의 걸인 사내는 걸인의 도를 실천하는 자인 게 맞다.
젊은 시절 나는 늘 어디론가 망명하고 싶었다. 절망에 인생의 팔 할을 내주었던 그때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낯선 나라에서 비밀 몇 개를 키우며 호젓하게 살고 싶었지만 나는 어디로도 떠나지를 못했다. 나는 암울한 동굴에 갇힌 채 꿈과 의지를 담금질하며 미래를 주조(鑄造)하던 시기를 보냈을 뿐이다.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으며 허송세월한 것은 그게 인생을 바꾸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20대 중반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하는 행운을 잡고 월급을 받아 생계를 꾸리면서 생활인이 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는데, 돌이켜보면, 나를 만든 건 약간의 결벽증과 넘치는 자의식, 그리고 방황하던 시절의 책과 고전음악이었다.
스무 해 전쯤 우리 사회에 교양 열풍이 불었다. 그 중심에는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란 책이 있었다. 슈바니츠는 교양을 상호 이해를 드높이는 의사소통의 한 양식으로, 몸과 정신, 문화가 한 인격체로 혼융된 형식이며 타인이란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는 형식으로 이해한다. 내 판단에 교양은 학습이나 훈련으로 길러질 수 있다. 그것은 재산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고, 교육의 정도에 비례하지도 않는다.
무교양인은 거칠고 탐욕스러우며 자기중심으로 사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법규나 공중도덕 따위를 무시하는 사람들. 사회 공동체의 문제를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 제 잇속을 위해 타인을 수단화하는 사람들. 올곧은 도덕을 삶의 푯대로 삼지 않는 사람들. 오로지 자기의 번성과 성공만을 앞세우고 욕망하는 자들이 만드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세상일 게 분명하다.
제 교양 없음에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사회는 무교양 사회다. 사회의 병폐로 꼽는 이념 쏠림, 부의 양극화, 이기주의, 흉한 범죄 따위는 무교양이 빚은 병리 현상일 테다. 그동안 교양으로 나를 감화시킨 인물이 없었던 까닭은 내가 무교양 사회의 일원이었던 탓이다. 누군가의 말과 식견, 태도에 감탄을 하고 기분이 나아졌다면 그를 교양인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무엇이든지 배우는 걸 좋아하고, 제 앎과 지혜의 범주에서 조촐하게 사는 교양인을 친구나 이웃으로 두고 더 자주 만나고 싶다.
도둑·걸인에게도 道가 있을진대
교양이란 무엇인가? 교양은 날 때 갖고 나오는 게 아니라 나서 배우고 익힌 너른 앎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태도일 테다. 양심에 잇댄 의식, 인격의 향기, 가장 좋은 것으로서의 삶 그 자체다. 교양은 도덕과 품성, 타인을 포용하는 능력,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매너를 아우르고, 더 나아가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 예술에 대한 조예, 삶의 태도에서 드러난다. 당신 곁에 있는 누군가가 늘 겸손과 너그러움, 갈등을 푸는 해법의 의젓함을 매너로 보여주는 사람이라면 그는 교양인임이 분명하다.식견과 분별이라는 측면에서 교양은 옛사람이 말하는 ‘도(道)’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장자 외편 ‘거협편’의 큰 도둑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그런 생각은 단단해진다. 도척의 무리가 도척에게 “도둑에게도 도가 있습니까?” 하고 묻는다. 도척은 이렇게 대답한다. “어디엔들 도가 없겠는가? 방 안에 감추어진 걸 잘 맞히는 것은 성(聖)의 경지요, 먼저 앞장서 들어가는 것은 용(勇)의 경지요, 가장 뒤에 나오는 것은 의(義)의 경지요, 도둑질이 성공할지 못 할지를 아는 것은 지(知)의 경지요, 고르게 나누는 것은 인(仁)의 경지라네, 이 다섯 가지를 갖추지 못하고서 큰 도둑이 된 자는 천하에 없었다네.” 도둑에게 도가 있다는 장자의 말은 우습기도 했지만 허가 찔린 느낌도 들었다. 그렇다면 걸인에게는 걸인의 도가 있을 테고, 지하철의 걸인 사내는 걸인의 도를 실천하는 자인 게 맞다.
타인이란 거울에 비춰 보는 나
열아홉 살 때 나를 덮친 건 불안이었다. 정규교육 궤도에서 이탈해 시립도서관 구석 의자에 몸을 파묻고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던 중이었다. 내게 넘치는 것은 햇빛과 시간, 불안과 절망이고, 모자란 것은 배움의 이력, 희망과 미래의 투명성이었다. 낫이나 쟁기 따위를 쥐고 애써 땀 흘린 적이 없는 날건달 같은 존재가 사람 구실을 하며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불안의 뿌리였다. 과연 나는 하찮은 직업을 가질 테고, 인생은 비루하기 짝이 없을 거라는 상상에 의기소침해지던 내가 기댈 은신처는 책밖엔 없었다. 그 시절 내 소망은 소박했는데, 그건 근심 없이 책을 쌓아놓고 날마다 꾸역꾸역 읽는 거였다.젊은 시절 나는 늘 어디론가 망명하고 싶었다. 절망에 인생의 팔 할을 내주었던 그때 여기가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낯선 나라에서 비밀 몇 개를 키우며 호젓하게 살고 싶었지만 나는 어디로도 떠나지를 못했다. 나는 암울한 동굴에 갇힌 채 꿈과 의지를 담금질하며 미래를 주조(鑄造)하던 시기를 보냈을 뿐이다. 시립도서관에 처박혀 책을 읽으며 허송세월한 것은 그게 인생을 바꾸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20대 중반 출판사 편집부에 입사하는 행운을 잡고 월급을 받아 생계를 꾸리면서 생활인이 되었다는 실감이 들었는데, 돌이켜보면, 나를 만든 건 약간의 결벽증과 넘치는 자의식, 그리고 방황하던 시절의 책과 고전음악이었다.
스무 해 전쯤 우리 사회에 교양 열풍이 불었다. 그 중심에는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란 책이 있었다. 슈바니츠는 교양을 상호 이해를 드높이는 의사소통의 한 양식으로, 몸과 정신, 문화가 한 인격체로 혼융된 형식이며 타인이란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는 형식으로 이해한다. 내 판단에 교양은 학습이나 훈련으로 길러질 수 있다. 그것은 재산의 많고 적음과 무관하고, 교육의 정도에 비례하지도 않는다.
무교양인은 거칠고 탐욕스러우며 자기중심으로 사는 이기주의자들이다.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법규나 공중도덕 따위를 무시하는 사람들. 사회 공동체의 문제를 나 몰라라 하는 사람들. 제 잇속을 위해 타인을 수단화하는 사람들. 올곧은 도덕을 삶의 푯대로 삼지 않는 사람들. 오로지 자기의 번성과 성공만을 앞세우고 욕망하는 자들이 만드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끔찍한 세상일 게 분명하다.
'이념 쏠림'도 무교양 사회의 병
슈바니츠는 교양을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교양의 으뜸 기준이 앎이라는 것엔 동의하지만 내 생각에 그것은 그보다 복합적인 무엇이다. 비문명이 경작되지 않은 야생의 땅을 일컫는 한에서 무교양인은 비문명에 가깝다는 뜻이 아닐까? 상식이라는 반석이 아니라 제멋대로 울퉁불퉁한 땅 위에 서 있는 무교양인과 함께 사는 일은 피곤하지 않을까? 교양은 천재의 덕목이 아니다. 사람들이 따르는 규범과 상식, 그 결에 따라 충실하게 사는 게 교양이다. 매사 초상식을 드러내는 사람은 괴물이거나 천재, 둘 중 하나일 테다. 매사에 초상식이라니! 그건 앎이 성기거나 괴이한 망상의 결과일 테다.제 교양 없음에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사회는 무교양 사회다. 사회의 병폐로 꼽는 이념 쏠림, 부의 양극화, 이기주의, 흉한 범죄 따위는 무교양이 빚은 병리 현상일 테다. 그동안 교양으로 나를 감화시킨 인물이 없었던 까닭은 내가 무교양 사회의 일원이었던 탓이다. 누군가의 말과 식견, 태도에 감탄을 하고 기분이 나아졌다면 그를 교양인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무엇이든지 배우는 걸 좋아하고, 제 앎과 지혜의 범주에서 조촐하게 사는 교양인을 친구나 이웃으로 두고 더 자주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