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누가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나
많은 국민이 정치 뉴스를 외면하며 우울한 새해를 보내고 있는 건 윤석열 대통령이 비상계엄으로 대한민국의 시계를 45년 전으로 되돌려놨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야 간, 국가기관 간 꼬일 대로 꼬인 실타래가 좀처럼 풀릴 기미가 없는 데다 언젠가 사태가 일단락된다고 해도 그 이후의 미래가 그려지지 않아서다. 이대로라면 양극단의 갈등이 더 격화해 심리적 내전이 물리적 내전으로 비화할 수도 있다는 무시무시한 상상이 머릿속을 맴돈다. 서점가에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라는 책이 역주행한다는 걸 보면 혼자만 느끼는 공포감은 아닌 듯하다.

민주주의 붕괴의 징후들

미국 하버드대 교수인 이 책의 저자들은 원래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벌어진 민주주의 퇴행을 연구해온 정치학자다. 도널드 트럼프의 2016년 대선 승리를 지켜보면서 미국 민주주의도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느꼈다. 이를 다루기 위해 2018년 쓴 책에서 저자들은 한국을 ‘온전히 살아남은 민주주의 국가’의 하나로 꼽았다. 이제 한국의 최근 사례를 넣어 개정판을 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현재 한국 정치의 모습은 책에 묘사된 민주주의 붕괴 국가들의 공통적 패턴과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패턴은 이렇다. ‘기성 정당과 정치인들은 더 이상 아웃사이더 선동가를 걸러내지 못한다. 오히려 정치적 이해관계에 그들과 결탁하고 당의 주류 자리를 내준다. 유튜브 등 새로운 형태의 미디어는 이런 현상을 가속화한다. 잠재적 독재자들은 총칼이 아니라 선거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권력을 쥐고,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사법부를 길들이고 교묘하게 선거제를 바꿔 운동장을 기울인다. 정치인들은 경쟁자를 반국가 세력으로 낙인찍는다. 선거에서 패배한 정당은 음모론을 제기하며 결과에 불복한다. 의회는 예산권을 빌미로 행정부를 혼란에 빠뜨리거나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탄핵을 추진한다.’

양극단을 소수화할 해법

윤 대통령은 지난 1일 지지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국가나 당이 아닌 국민 한분 한분이 주인인 자유 민주주의는 언젠가 승리할 것”이라고 썼다. 전형적인 선동가의 언어다. “직접 민주주의를 강화하고 당원주권시대를 열겠다”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 양극단의 지지자를 결집해 정당의 문지기 기능을 무력화하겠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양극화한 정치 세력은 민주주의 회복이 아니라 내전 승리를 목표로 한다.

책의 저자들은 사실 미국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건 헌법 자체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규범이라고 말한다. 상대 진영을 적이 아니라 정당한 경쟁자로 보는 ‘상호 관용’, 법적 권리라도 신중하게 사용하는 ‘제도적 자제’다. 여권은 야권을 반국가 세력으로, 야권은 여권을 내란 세력으로 규정하는 한국 정치에서 상호 관용의 규범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의석수를 앞세워 29차례 탄핵소추안을 발의한 야당, ‘헌법적 권한’이라며 비상계엄을 선포한 윤 대통령 모두 제도적 자제와도 거리가 멀다.

무너지는 민주주의를 되살릴 방법은 양당의 중심을 차지해버린 양극단을 소수화, 주변화하는 것뿐이다. 개헌이 될 수도 있고, 선거제 개편이 될 수도 있다. 눈앞의 이해관계를 내려놓고 진지한 해법을 제시하는 정치 세력에 침묵하는 다수가 힘을 실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