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혹한 시대 남프랑스에서 꽃피운 예술혼, 영화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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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황영미의 프롬나드 인 시네마
영화 <르누아르>를 통해 볼 수 있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예술혼
그가 생의 마지막을 머무른 장소에 지어진
남프랑스의 르누아르 박물관
영화 <르누아르>를 통해 볼 수 있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예술혼
그가 생의 마지막을 머무른 장소에 지어진
남프랑스의 르누아르 박물관
영화 <르누아르>의 빛과 색감
많은 화가가 남프랑스를 사랑한 탓에 고향을 떠나 그곳에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고흐가 아를에, 피카소는 앙티브에, 마티스는 니스에 살았고, 샤갈은 생폴드방스에 육신을 묻었다. 세잔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도 빼놓을 수 없다.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되는 남프랑스는 신이 내린 축복의 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만, 특별히 화가들에게 중요한 빛, 햇빛이 선명해 모든 사물의 색감을 돋보이게 하는 신비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어느 계절이든 과일도 빛깔이 다르며 바람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바다도 강도 강렬한 색감으로 자체 폭발하며 아름다움의 지경을 넓힌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혹독한 시대에도 아름다운 예술을 꽃피운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오귀스트 르누아르도 말년에 온몸이 굳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심해져 따뜻한 남프랑스로 가면 낫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생의 마지막 12년을 남프랑스에서 살았다.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질 부르도스 감독의 영화 <르누아르>(2012)는 남프랑스에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예술혼을 불태운 말년의 르누아르(미셀 부케)의 삶을 그린다.
그는 붓을 들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붓을 손에 묶은 채 그림에 혼신을 다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강렬하게 예술로 이끌었을까. 이 영화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 장 르누아르의 <사랑 그림(Le tableau amoureux)>이 원작이라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목발을 짚고 집에 돌아온 차남 장(빈센트 로티어스)은 이런 시대에 아버지는 왜 아름다운 그림만 그리는지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그림은 기쁨에 넘치고 활기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생 자체가 우울한데, 그림이라도 밝아야 한다며, 가난, 절망, 죽음, 전쟁은 싫다고 하고, 비극은 누군가 잘 그릴 거라고 말한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아름다운 그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르누아르는 그를 찾아온 말년의 모델이자 뮤즈였던 미모의 15세의 앙드레(크리스타 테렛)를 모델로 칠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그림에 대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밤새 잠 못 이뤄 비명을 지르지만, 날이 새면 아름다운 모델에 힘입어 야외 누드라는 장르를 개척할 정도로 마음껏 창의력을 펼쳐나갔다. 예술에 나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집에 돌아온 차남 장은 아버지의 누드 모델이 된 배우 지망생 앙드레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하게 되고, 매력 넘치는 그녀는 그와의 사랑에 주저하지 않았다. 직업이 군인임을 천명하며 군복을 입고 지내는 장은 다리의 상처가 회복되자 전장으로 복귀하고자 한다. 본인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죽음의 전쟁터 행을 결정한 장을 원망하며 앙드레는 르누아르 집안과 담을 쌓게 된다.
누아르도 큰아들은 전쟁에서 팔을 다쳤고, 작은아들은 다리를 다쳐 마음이 아프지만, 전장으로 떠나려는 아들을 눈물을 삼키며 껴안는다. 그리고 장에게 앙드레를 찾아 그녀와 다시 화해하도록 권유한다. 이 영화는 르누아르의 화폭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색감을 담아낸다. 남프랑스 코트다쥐르(Côte d'Azur) 지역의 밝고 환한 태양은 빛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검은색을 배제하고 주황빛을 아름답게 표현했던 르누아르의 색감을 살려 앙드레의 첫 등장은 눈부시게 강렬한 주황빛 재킷과 스커트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주황빛 긴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르누아르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르누아르의 삶의 모습을 아련하게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르누아르 작품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아름다운 그림이 만들어지기 위해 굳어가는 손을 뜨거운 파라핀에 담그기도 하고, 붓과 손을 함께 싸매기도 하면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참아내기도 한다. 영화 속 르누아르의 세계는 온 세상이 전쟁통으로 혼란스러울지라도 인간을 보는 사랑의 힘이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누아르 생애의 빛과 그림자
르누아르는 가난한 석공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견습생으로 생업을 삼다가 클로드 모네를 만나게 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 에콜 데 보자르(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 합격하고 살롱전에도 입상하며 인상파 화가들과의 교분도 깊어지고 유명해진다.
친구의 화실 한쪽 구석에서 기거하기도 하고, 친구에게 받은 그림을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비에 쪼들렸던 초년의 고생에도 그의 그림은 한결같이 따스하고 밝았다. 이후 인정받아 그림을 팔아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후에는 이제 온몸이 굳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고생하게 된다. 따뜻한 곳에 살면 덜해질까 하여 남프랑스에 저택을 지어 살게 된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이기도 한 차남 장 르누아르는 영화에서의 앙드레(카트린 에슬링(Catherine Hessling)으로 개명)와 함께 할리우드로 떠나 영화감독이 되었다.
장은 <게임의 규칙>(1939) 등으로 유명하게 되었고, <남부사람>(1945)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도 오르는 등 초기 프랑스 영화에서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1975년에는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하게 된다. 앙드레는 장과 결혼하고 배우로서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그와 헤어진 후에는 가난하게 살다가 혼자 사망하는 등 불행으로 점철됐다고 전해진다.
르누아르 박물관에서의 평온함
남프랑스 니스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 마을 카뉴쉬르메르(Cagnes-sur-Mer)에 있는 르누아르 박물관을 찾았다. 가는 길에 르누아르 거리라는 표지판과 박물관 방향도 알려주는 표지판도 있었다. 박물관에 일찍 도착해서 아직 문을 열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방문한 노부부도 르누아르를 좋아해서 일찍 찾았다고 했다. 한국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기생충>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넷플릭스에서 재미있게 보았다고 했다.
이후 입구로 들어가니 거대한 정원이 펼쳐졌다. 르누아르가 수백 년 된 올리브 나무와 감귤나무가 심어진 웅장한 부지인 레 콜레트(Les Collettes)로 이사한 것은 1908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 12년을 보냈는데, 집 뒤편 벽에 있는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박물관 내에서는 그의 작업장과 14점의 원본 그림, 40여 점의 조각품, 가구, 르누아르가 실제로 그렸던 이젤과 휠체어도 잘 전시를 해두어서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르누아르는 이 집에 와서 조각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르누아르가 조각에 심취해 이처럼 많은 조각 작품을 남겼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조각 작품의 섬세함에 놀랐다. 남프랑스의 따스한 기후와 내리쬐는 밝은 햇빛 덕분에 그는 외광파의 거장이라고 불릴 만큼 나무와 꽃뿐만 아니라 누드까지 야외에서 그릴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으로 보인다. 빛은 인상파인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으며, “이제야 그림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매일 시간에 쫓겨가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며 살아가고 있다. 르누아르 박물관에서 그림과 조각을 감상할 때의 행복감과 정원에서의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을 떠올리며 한 호흡 쉬어가며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다시금 든다. 영화 <르누아르>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엄혹한 시대에도 아름다운 그림을 창조했던 르누아르의 예술혼을 떠올리며 앞으로 내 생애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큰 그림을 구상해 보게 된다.
황영미 영화평론가
많은 화가가 남프랑스를 사랑한 탓에 고향을 떠나 그곳에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고흐가 아를에, 피카소는 앙티브에, 마티스는 니스에 살았고, 샤갈은 생폴드방스에 육신을 묻었다. 세잔의 고향인 엑상프로방스도 빼놓을 수 없다.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되는 남프랑스는 신이 내린 축복의 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지만, 특별히 화가들에게 중요한 빛, 햇빛이 선명해 모든 사물의 색감을 돋보이게 하는 신비함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어느 계절이든 과일도 빛깔이 다르며 바람도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바다도 강도 강렬한 색감으로 자체 폭발하며 아름다움의 지경을 넓힌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혹독한 시대에도 아름다운 예술을 꽃피운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오귀스트 르누아르도 말년에 온몸이 굳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심해져 따뜻한 남프랑스로 가면 낫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생의 마지막 12년을 남프랑스에서 살았다.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된 질 부르도스 감독의 영화 <르누아르>(2012)는 남프랑스에 집을 짓고 죽을 때까지 예술혼을 불태운 말년의 르누아르(미셀 부케)의 삶을 그린다.
그는 붓을 들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 붓을 손에 묶은 채 그림에 혼신을 다했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강렬하게 예술로 이끌었을까. 이 영화는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 장 르누아르의 <사랑 그림(Le tableau amoureux)>이 원작이라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목발을 짚고 집에 돌아온 차남 장(빈센트 로티어스)은 이런 시대에 아버지는 왜 아름다운 그림만 그리는지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르누아르는 그림은 기쁨에 넘치고 활기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생 자체가 우울한데, 그림이라도 밝아야 한다며, 가난, 절망, 죽음, 전쟁은 싫다고 하고, 비극은 누군가 잘 그릴 거라고 말한다. 시대가 어두울수록 아름다운 그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르누아르는 그를 찾아온 말년의 모델이자 뮤즈였던 미모의 15세의 앙드레(크리스타 테렛)를 모델로 칠십 대 중반의 나이에도 그림에 대한 마지막 열정을 불태운다.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밤새 잠 못 이뤄 비명을 지르지만, 날이 새면 아름다운 모델에 힘입어 야외 누드라는 장르를 개척할 정도로 마음껏 창의력을 펼쳐나갔다. 예술에 나이는 없다는 것을 증명한 셈이다. 집에 돌아온 차남 장은 아버지의 누드 모델이 된 배우 지망생 앙드레를 보자마자 한눈에 반하게 되고, 매력 넘치는 그녀는 그와의 사랑에 주저하지 않았다. 직업이 군인임을 천명하며 군복을 입고 지내는 장은 다리의 상처가 회복되자 전장으로 복귀하고자 한다. 본인과 한마디 의논도 없이 죽음의 전쟁터 행을 결정한 장을 원망하며 앙드레는 르누아르 집안과 담을 쌓게 된다.
누아르도 큰아들은 전쟁에서 팔을 다쳤고, 작은아들은 다리를 다쳐 마음이 아프지만, 전장으로 떠나려는 아들을 눈물을 삼키며 껴안는다. 그리고 장에게 앙드레를 찾아 그녀와 다시 화해하도록 권유한다. 이 영화는 르누아르의 화폭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색감을 담아낸다. 남프랑스 코트다쥐르(Côte d'Azur) 지역의 밝고 환한 태양은 빛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검은색을 배제하고 주황빛을 아름답게 표현했던 르누아르의 색감을 살려 앙드레의 첫 등장은 눈부시게 강렬한 주황빛 재킷과 스커트를 입고 자전거를 타고 주황빛 긴 머리칼을 휘날리면서 르누아르 집으로 들어가는 장면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르누아르의 삶의 모습을 아련하게 담고 있는 이 영화는 르누아르 작품 탄생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는 아름다운 그림이 만들어지기 위해 굳어가는 손을 뜨거운 파라핀에 담그기도 하고, 붓과 손을 함께 싸매기도 하면서 고통스러운 과정을 참아내기도 한다. 영화 속 르누아르의 세계는 온 세상이 전쟁통으로 혼란스러울지라도 인간을 보는 사랑의 힘이 밑바탕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르누아르 생애의 빛과 그림자
르누아르는 가난한 석공의 아들로 어릴 적부터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견습생으로 생업을 삼다가 클로드 모네를 만나게 되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 에콜 데 보자르(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 합격하고 살롱전에도 입상하며 인상파 화가들과의 교분도 깊어지고 유명해진다.
친구의 화실 한쪽 구석에서 기거하기도 하고, 친구에게 받은 그림을 팔아야 할 정도로 생활비에 쪼들렸던 초년의 고생에도 그의 그림은 한결같이 따스하고 밝았다. 이후 인정받아 그림을 팔아서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춘 후에는 이제 온몸이 굳는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고생하게 된다. 따뜻한 곳에 살면 덜해질까 하여 남프랑스에 저택을 지어 살게 된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이기도 한 차남 장 르누아르는 영화에서의 앙드레(카트린 에슬링(Catherine Hessling)으로 개명)와 함께 할리우드로 떠나 영화감독이 되었다.
장은 <게임의 규칙>(1939) 등으로 유명하게 되었고, <남부사람>(1945)으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도 오르는 등 초기 프랑스 영화에서 영향력 있는 영화감독이 되었다. 1975년에는 아카데미 공로상을 수상하게 된다. 앙드레는 장과 결혼하고 배우로서 많은 영화에 출연했으나, 그와 헤어진 후에는 가난하게 살다가 혼자 사망하는 등 불행으로 점철됐다고 전해진다.
르누아르 박물관에서의 평온함
남프랑스 니스에서 조금 떨어진 바닷가 마을 카뉴쉬르메르(Cagnes-sur-Mer)에 있는 르누아르 박물관을 찾았다. 가는 길에 르누아르 거리라는 표지판과 박물관 방향도 알려주는 표지판도 있었다. 박물관에 일찍 도착해서 아직 문을 열지 않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방문한 노부부도 르누아르를 좋아해서 일찍 찾았다고 했다. 한국 영화를 본 적이 있는지 물어봤는데, <기생충>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넷플릭스에서 재미있게 보았다고 했다.
이후 입구로 들어가니 거대한 정원이 펼쳐졌다. 르누아르가 수백 년 된 올리브 나무와 감귤나무가 심어진 웅장한 부지인 레 콜레트(Les Collettes)로 이사한 것은 1908년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이 된 이곳에서 생의 마지막 12년을 보냈는데, 집 뒤편 벽에 있는 명판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오귀스트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 르누아르는 이 집을 1907년 레 콜레트(Les Collettes)에 지었고, 1919년 12월 3일 세상을 떠날 때까지 주로 겨울 동안 거주했다. 여름에 그는 에소이(Essoyes)에 있는 집에 머물렀는데, 그곳은 그의 아내 알린 샤리고(Aline Charigot, 1859-1915)가 태어난 곳이다. 이 명판은 1969년 12월 3일 트루아(Troyes)와 에소이(Essoyes) 도시의 협조로 세워졌다.”르누아르가 사망한 1919년 이후, 나무들은 쉼 없이 자라고 정원은 더욱 아름답게 꾸며져 평화와 녹지의 안식처가 되었다. 정원 벤치에 앉아보니 지난 세월의 흐름이 잊히며 르누아르가 곁에 있는 것 같이 느껴졌다.
박물관 내에서는 그의 작업장과 14점의 원본 그림, 40여 점의 조각품, 가구, 르누아르가 실제로 그렸던 이젤과 휠체어도 잘 전시를 해두어서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었다. 르누아르는 이 집에 와서 조각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르누아르가 조각에 심취해 이처럼 많은 조각 작품을 남겼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지만, 무엇보다 조각 작품의 섬세함에 놀랐다. 남프랑스의 따스한 기후와 내리쬐는 밝은 햇빛 덕분에 그는 외광파의 거장이라고 불릴 만큼 나무와 꽃뿐만 아니라 누드까지 야외에서 그릴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으로 보인다. 빛은 인상파인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그는 죽기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으며, “이제야 그림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매일 시간에 쫓겨가며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달려가며 살아가고 있다. 르누아르 박물관에서 그림과 조각을 감상할 때의 행복감과 정원에서의 시간이 멈춘 듯한 평온함을 떠올리며 한 호흡 쉬어가며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이 다시금 든다. 영화 <르누아르>를 통해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엄혹한 시대에도 아름다운 그림을 창조했던 르누아르의 예술혼을 떠올리며 앞으로 내 생애 무엇을 남길 것인가라는 큰 그림을 구상해 보게 된다.
황영미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