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손 데워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 [고두현의 아침 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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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밤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빡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연(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이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 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 아주 서늘한 서정이 잘 녹아 있는 시입니다. 늘 깊고 아픈 시를 쓰는 것처럼 느껴지는 조용미 시인의 시풍으로 보자면 의외로 재미있는 시라 할 수 있지요. 이 시를 고른 것은 ‘마늘꿀절임’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 때문이지요.
너와 내가 만나서 인연이 되는 순간, 너와 나는 없고 우리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각기 개별체로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 과정에서 형과 질은 변하는 걸까요, 변하지 않는 걸까요.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는 시인의 표현이 묘합니다.
하이쿠를 연상케 하는 마지막 행,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리는 밤엔 결국 나도 당신도 없고 맑고 깊은 밤만 있는 건 아닌지... 시인은 창작 배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몸이 차가운 사람에게 좋다는 마늘꿀절임을 담가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유리병을 발견하고 보니 담근 날짜와 그날로부터 두 달 후에 먹어야 한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두 해가 훌쩍 지나 있었다. 마늘과 꿀은 스미고 스며들어 서로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걸 들여다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던가. 시적 순간이란 문득 그렇게 찾아온다. 목이 메고, 마음이 사무치는 소소한 깨달음과 슬픔의 순간에.”
시인은 “일상을 살면서 시적 정황은 수도 없이 많지만 마늘꿀절임 같은 시적 순간은 쉰 번에 한 번 맞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변질된 마늘꿀절임을 쓰레기통에 넣었겠지만 시인은 곁에 두고 지냈습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나 생각이 혼란스러울 때 한 숟가락씩 떠서 입에 넣었습니다. 곰곰이 그 맛을 느끼며 세상 모든 것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 사유를 오래 묵혀 빚어낸 게 이 시입니다. 마늘꿀절임이 담겼던 유리병은 비었지만 시는 풍성해졌지요.
마늘과 꿀의 경계가 무너진 이 시간은 화학반응을 일으켜 내 안에 새로운 대상을 탄생케 합니다. 그 순간 가을밤도 전혀 다른 감각으로 거듭납니다.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 잔잔히 일렁이는 그 깊은 방에 가만히 앉아 있고 싶어집니다. 잎을 떠나는 물소리 곁에서 중얼거리고 싶은 시이기도 합니다.
서정시라고 하면 대개 ‘따뜻한 서정’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는 ‘서늘한 서정’이 어떤 맛을 내는지 잘 보여줍니다. 흔치 않은 시적 매력이 산뜻하게 다가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조용미
마늘과 꿀을 유리병 속에 넣어 가두어두었다 두 해가 지나도록 깜빡 잊었다 한 숟가락 뜨니 마늘도 꿀도 아니다 마늘이고 꿀이다
당신도 저렇게 오래 내 속에 갇혀 있었으니 형과 질이 변했겠다
마늘에 연(緣)하고 꿀에 연하고 시간에 연하고 동그란 유리병이 둘러싸여 마늘꿀절임이 된 것처럼
내 속의 당신은 참 당신이 아닐 것이다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
또 한 숟가락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을,
가을밤은 맑고 깊어서 방 안에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어앉는다
------------------------------------------------------- 아주 서늘한 서정이 잘 녹아 있는 시입니다. 늘 깊고 아픈 시를 쓰는 것처럼 느껴지는 조용미 시인의 시풍으로 보자면 의외로 재미있는 시라 할 수 있지요. 이 시를 고른 것은 ‘마늘꿀절임’ 때문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나의 손과 발을 따뜻하게 해줄 마늘꿀절임 같은 당신’ 때문이지요.
너와 내가 만나서 인연이 되는 순간, 너와 나는 없고 우리가 됩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우리는 각기 개별체로 빛나는 존재입니다. 그 과정에서 형과 질은 변하는 걸까요, 변하지 않는 걸까요. ‘변해버린 맛이 묘하다’는 시인의 표현이 묘합니다.
하이쿠를 연상케 하는 마지막 행,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가 다’ 들리는 밤엔 결국 나도 당신도 없고 맑고 깊은 밤만 있는 건 아닌지... 시인은 창작 배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몸이 차가운 사람에게 좋다는 마늘꿀절임을 담가두고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느 날 유리병을 발견하고 보니 담근 날짜와 그날로부터 두 달 후에 먹어야 한다는 메모가 붙어 있었다. 두 해가 훌쩍 지나 있었다. 마늘과 꿀은 스미고 스며들어 서로 까맣게 변해 있었다. 그걸 들여다보며 잠시 멍하니 서 있었던가. 시적 순간이란 문득 그렇게 찾아온다. 목이 메고, 마음이 사무치는 소소한 깨달음과 슬픔의 순간에.”
시인은 “일상을 살면서 시적 정황은 수도 없이 많지만 마늘꿀절임 같은 시적 순간은 쉰 번에 한 번 맞기도 어렵다”고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면 변질된 마늘꿀절임을 쓰레기통에 넣었겠지만 시인은 곁에 두고 지냈습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나 생각이 혼란스러울 때 한 숟가락씩 떠서 입에 넣었습니다. 곰곰이 그 맛을 느끼며 세상 모든 것의 인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 사유를 오래 묵혀 빚어낸 게 이 시입니다. 마늘꿀절임이 담겼던 유리병은 비었지만 시는 풍성해졌지요.
마늘과 꿀의 경계가 무너진 이 시간은 화학반응을 일으켜 내 안에 새로운 대상을 탄생케 합니다. 그 순간 가을밤도 전혀 다른 감각으로 거듭납니다. ‘연못 물 얇아지는 소리’ 잔잔히 일렁이는 그 깊은 방에 가만히 앉아 있고 싶어집니다. 잎을 떠나는 물소리 곁에서 중얼거리고 싶은 시이기도 합니다.
서정시라고 하면 대개 ‘따뜻한 서정’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는 ‘서늘한 서정’이 어떤 맛을 내는지 잘 보여줍니다. 흔치 않은 시적 매력이 산뜻하게 다가옵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