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뮤지컬로 이번에 처음 무대에 올려진 ‘스윙데이즈_암호명 A’는 일제강점기 말인 1945년을 배경으로 한다. 냅코 프로젝트(NAPKO Project)라는 비밀 독립작전의 실화를 기반으로 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한양행의 설립자 기업인 고(故) 유일한(1895~1971) 박사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나는 안티푸라민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이 나무 심기 등 환경보호와 사회공헌에 앞장서는 훌륭한 기업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유일한 박사가 항일 첩보원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실제로 그가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첩보국(OSS) 소속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연결하고 지원하는 암호명 A의 요원이었다는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야 밝혀졌다고 한다.

막이 오르면 유일형 사장이 주최하는 화려한 파티가 한창이다. 그는 미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남몰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그의 곁에는 오랜 친구인 만용이 있고, 일본군 중좌가 된 또 한 명의 옛 친구 야스오는 그를 의심하고 줄곧 행적을 뒤쫓는다. 유일형은 OSS의 스파이가 되어 조선에 제약회사를 설립하고 조선총독부 총독 곤도의 신임을 얻어 사업을 확장하며 일본의 고급 정보를 캐낸다. 이러한 줄거리를 바탕으로 유일형의 중국인 약혼녀 호메리, 여성 독립운동가 베로니카 등도 등장하는데 기본적으로 이야기 구성이 탄탄하다.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 사진제공 = 올댓스토리, 컴퍼니 연작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 사진제공 = 올댓스토리, 컴퍼니 연작
LED를 활용해 공들인 무대 연출이 훌륭하고 김문정 음악감독이 지휘하는 오케스트라 연주의 박진감이 더해져 보는 내내 국내 창작뮤지컬 수준이 대단히 높아졌음을 새삼 실감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연기와 대부분의 노래가 좋아서 눈과 귀가 즐거운 관람이었다. 내가 본 날에는 훤칠한 키에 카리스마 있는 신성록이 유일형 역을 맡아 안정감이 있었고, 정통 뮤지컬 무대에서 호연을 펼친 정상훈 배우에게도 큰 박수를 보냈다. 팬텀싱어에서 좋아했던 고훈정을 다시 봐 반가웠고 곤도 역 성기윤의 묵직한 연기와 노래에 감탄했다. 전나영과 이지숙의 음색은 서로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각각의 두 배우 노래는 극장을 나서도 귓가를 맴돌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단, 1부가 2부에 비해 약간 늘어지는 느낌이 있었기에 나중에 1부는 좀 더 속도감 있게 축약하면 좋지 않을까 싶다.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유일형 役의 신성록. / 사진제공 = 올댓스토리, 컴퍼니 연작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유일형 役의 신성록. / 사진제공 = 올댓스토리, 컴퍼니 연작
이 뮤지컬을 본 올해 2025년은 을사년이다. 120년 전의 을사년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그로 인해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기고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공교롭게도 작금의 나라 현실은 마치 대한제국의 말기와 비슷하다. 무능했던 고종은 군수 자리까지 매관매직을 했고, 노론을 자처하며 당파에 따라 노골적인 차별을 했다. 고종을 둘러싼 황족과 외척들의 부정부패는 나라의 재정을 압박했다. 민비는 진령군이라는 무당을 맹신하여 궁 한가운데서 굿판을 벌일 정도로 무속과 점술에 중독되어 있었다. 고종과 민비의 믿음을 바탕으로 진령군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쯤 되면 요즘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스스로 황제가 된 고종처럼 제국을 꿈꾸듯 손바닥에 왕이라는 글자를 쓰고 다녔던 대통령이 한 달 전 어이없게도 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마비시키려 했다. 뿐만 아니라 계엄을 정당화하기 위해 북한과의 국지전을 유도하려 한 정황이 있다. 만일 실제로 군사 충돌이 이어졌다면 또다시 이 땅에 전쟁이 터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경우 호시탐탐 한반도 진출을 노리는 일본 자위대가 미국과의 글로벌 동맹을 명분 삼아 이 땅에 다시 들어올 가능성도 있다. 최근 정부의 대일 외교는 오히려 그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는 쪽이었다.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곤도 役의 성기윤. / 사진제공 = 올댓스토리, 컴퍼니 연작
뮤지컬 '스윙 데이즈_암호명 A'. 곤도 役의 성기윤. / 사진제공 = 올댓스토리, 컴퍼니 연작
그뿐만 아니라 이번 정부는 일본의 강제 동원 배상에 대해 한국 측에서 재원을 마련해 지원하는 방안을 확정했고, 조선인이 강제징용 된 사도광산을 일본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는 것에 협조했으며, 육군사관학교의 홍범도 장군 흉상을 치워버렸다. 심지어 대통령은 3.1절 기념사에서 “우리가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그대로 역설했다. 나는 ‘스윙 데이즈, 암호명 A’를 보며 아직도 식민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인을 학살하고 더 나아가 한민족 말살을 기도한 일본의 이익을 우리 정부가 나서서 우선시해주고 있는 거짓말 같은 현실을 생각하며 여러 번 분노했다.

계엄이 선포된 그날 밤, 나는 맨몸으로 달려 나와 장갑차를 막아서고 국회를 에워싼 이름 모를 시민들에게 말 못할 정도로 크게 감동했다. 그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거슬러 올라가면 독립운동 전에 항일 의병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시작되어 을사의병, 정미의병을 거쳐 독립군으로 이어진 그 정신이 지금의 우리들 DNA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의 총칼 앞에 스러져간 수많은 의병. 그리고 독립운동가들. 이제 그 안에 유일한 박사의 이름을 넣어 기억해야겠다. 한 편의 뮤지컬이 구한말 같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우울을 위로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