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스

    ADVERTISEMENT

    [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을씨년스럽다'에 담긴 문법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앞말에 붙어 어떤 속성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에는 '-스럽다'와 '-답다'가 있다. '-스럽다'는 '어떤 자격이나 정도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런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을 나타낼 때 쓰인다.-답다'는 실제로 '어떤 자격이나 정도에 이르러' 그런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2025년 을사년 대한민국을 주제로 챗GPT가 그려낸 이미지.
    2025년 을사년 대한민국을 주제로 챗GPT가 그려낸 이미지.
    을사년 새해가 밝았지만 올해 분위기는 예전과 사뭇 다르다. 계엄과 탄핵 사태로 정국은 불안하고, 경제도 암울하기 짝이 없다. 희망과 기대보다 스산하고 쓸쓸한 한탄 소리가 넘쳐난다. 우리말 ‘을씨년스럽다’라는 표현이 이보다 잘 어울릴 수 없다. 날씨나 분위기가 몹시 황량해 스산하고 쓸쓸한 기운이 있다는 뜻이다. 주로 날씨에 쓰던 말인데, 요즘은 주위를 둘러싼 상황에 빗대거나, 가난한 살림살이를 나타내는 데도 사용한다.

    ‘-스럽다’와 ‘-답다’ 용법 구별해야

    이 말의 정체는 정확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정설처럼 널리 알려진 얘기가 있다. ‘을사년(乙巳年)스럽다’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육십갑자가 두 번 거듭하기 꼭 120년 전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다. 예전에 을사보호조약이니, 줄여서 을사조약이니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의미상 맞는 말이다. 한자어 ‘늑(勒)’이 ‘굴레(마소를 부리기 위해 머리에 씌워 고삐에 연결한 물건), 억누름, 강요’란 뜻을 담고 있다.

    이로써 대외적으로 일본의 속국이 돼 우리 민족에겐 치욕으로 남은 해가 됐다. 비통한 민족의 울분을 당시 황성신문 주필로 있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란 제목의 글로 전했다. ‘이날에 목놓아 크게 우노라’란 뜻이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몹시 쓸쓸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을사년스럽다’고 했고, 이 말이 형태를 바꿔 지금의 ‘을씨년스럽다’가 됐다는 게 요지다. ‘뱀 사(巳)’ 자의 중국어 발음이 시[si]라서 ‘을사>을시>을씨’로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다.

    을씨년스럽다는 이런 어원 논란과 별개로 우리말 파생어와 관련한 문법적 측면도 들여다볼 만하다. 접미사 ‘-스럽다’와 ‘-답다’의 용법과 관련해서다. 우리말에서 앞말에 붙어 어떤 속성이 있음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에는 ‘-스럽다’와 ‘-답다’가 있다. 두 말의 용법에는 미세한 듯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이들을 구별 짓는 것은 ‘어떤 자격이나 정도에 실제로 다다랐는지’의 여부다. 가령 어린이에게 “너 참 어른스럽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하지만 “너 참 어른답구나”라고 하면 어색하다. 이는 ‘-스럽다’가 실제로는 ‘어떤 자격이나 정도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런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을 나타낼 때 쓰인다는 것을 뜻한다.

    ‘-답다’ 파생어는 긍정적 의미 띠어

    이에 비해 ‘-답다’는 실제로 ‘어떤 자격이나 정도에 이르러’ 그런 성질이나 특성이 있음을 나타낸다. “어른은 어른답게 행동해야 한다” 같은 게 그 예다. 이미 어른인 사람한테는 ‘어른답게’ 행동한다고 하지 ‘어른스럽게’ 행동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아이는 어린데도 말하는 게 어른스럽다”라고 한다. 이를 ‘어른답다’라고 하면 어색하다. 형이나 아버지는 이미 형이고 아버지이므로(어떤 자격이나 정도에 다다른 것이므로) ‘형답다’ ‘아버지답다’란 말은 써도 ‘형스럽다’ ‘아버지스럽다’ 같은 말은 쓰지 않는다.

    ‘-스럽다’는 ‘평화스럽다, 복스럽다, 사랑스럽다, 걱정스럽다, 자랑스럽다, 영광스럽다, 고민스럽다, 고생스럽다, 자연스럽다, 다행스럽다’ 등 무수한 우리말 파생어를 낳았다. 그런데 이런 말들에 공통적으로 들어 있는 의미자질이 하나 있다. 어근(말뿌리) 자리에 주로 추상적인 말이 온다는 점이다.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홍성호 이투데이 기사심사위원·前 한국경제신문 기사심사부장
    이에 비해 ‘-답다’는 구체적 대상이 올 때 자연스럽다. ‘사내답다, 공무원답다, 선생님답다, 너답다, 국가대표선수답다’ 같은 게 그런 예다. ‘-답다’가 만드는 파생어에도 공통적 의미자질이 있다. 앞에 오는 말(어근)의 긍정적 속성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부정적 의미로 쓰이는 말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비통하고 쓸쓸한 느낌을 주는 말로 ‘을사년+답다’보다 ‘을사년+스럽다’가 결합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ADVERTISEMENT

    1. 1

      [커버스토리] 삶에 녹아든 AI…무엇을 바꿔놓을까

      생성형 인공지능(AI) 챗GPT가 2022년 말 혜성처럼 등장한 이후, AI는 많은 이슈를 몰고 왔습니다. 예를 들어, 챗GPT에 의존해 작성한 대학생 연구과제를 어디까지 인정할 거냐라는 문제부터 AI가 인류를 위협...

    2. 2

      [생글기자 코너] 학생 의견 반영 줄어든 교원평가제도 개편

      교육부가 최근 교원능력개발평가를 교원역량개발지원 제도로 대폭 개편하기로 했다. 교원능력개발평가는 교사의 수업과 생활지도에 대해 학생, 학부모, 동료 교사들이 평가하고 그 결과를 교사 연수에 활용하는 제도다. 2010...

    3. 3

      [남정욱의 종횡무진 경제사] 영국 처칠이 독일함대 제압했던 힘은 '석유'

      1911년 여름에서 가을까지 세상에서 가장 바빴던 사람은 아마도 윈스턴 처칠이었을 것이다. 그해 7월 독일제국 빌헬름 황제가 모로코의 아가디르항에 군함을 파견해 아프리카에서 프랑스의 영향력에 의문을 제기하기 전까지만...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