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터테너 이동규가 지난 9일 서울 예술의전당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문덕관 작가
카운터테너 이동규가 지난 9일 서울 예술의전당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 하고 있다. 문덕관 작가
18세기 카스트라토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파리넬리'(1995). 소프라노처럼 청명한 고음을 내던 19세 소년은 자신과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파리넬리에게 매료됐다. 한국의 1세대 카운터테너 이동규(46·사진) 이야기다. 카운터테너는 여성 음역까지 낼 수 있는 남성 성악가로 과거 카스트라토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지난 9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동규는 "파리넬리를 보고 내 목소리도 자리가 있다, 성악가를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어린이합창단을 오래 했었는데, 미성인 제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어요. 변성기가 지나도 유지할 수 있도록 스스로 발성을 터득했죠. 당시 집안 형편이 안 좋아서 노래를 직업으로 삼을 생각도 없었고, 제 목소리로 노래하려면 여장을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파리넬리를 보고 성악의 길로 이끌렸죠"
"여러 재료 쓰는 요리사처럼, 경계없는 음악가 되고싶어요"
그렇게 그는 캐나다 밴쿠버 음악 아카데미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성악을 배웠다. 스페인 비냐스 콩쿠르(2006), 뉴욕의 조지 런던 콩쿠르(2006)에서 잇따라 우승하며 세계 무대로 진출했다. 밀라노 라 스칼라,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하우스 등 최정상급 오페라 극장에도 캐스팅됐다.

다만, 그는 특이한 성부였기에 좁은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레퍼토리도 바로크, 현대 음악에 한정돼 있었고 이탈리아 오페라를 주로 무대에 올리는 한국에서는 더욱 배역이 적었다. 자연히 실력만큼 명성을 얻기는 힘들었다. "항상 제 역할을 확장하고 싶다는 갈망이 있었어요. 한국에서 섭외가 오면 '아베 마리아', '울게 하소서'를 불러달라는 요청이 대부분이었어요. 그거만 계속 부르니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여러 재료 쓰는 요리사처럼, 경계없는 음악가 되고싶어요"
그러던 그에게 인생 2막이 시작됐다. 2023년 JTBC 팬텀싱어4에 출연하게 되면서다. 4인조 그룹 포르테나로 출연해 준우승을 차지한 그는 "팬텀싱어 출신 통틀어서 제가 프로그램으로 가장 덕을 크게 본 사람일 것"이라고 했다. "'성악가가 이런 노래도 할 줄 알아?'라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어요. 제겐 큰 도전이었고,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줬죠"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클래식계의 시각은 대체로 부정적이다. 마이크를 쓰는 만큼 정통 성악 발성을 살리기 어렵고, 인기에만 치중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 역시 같은 이유로 고민했다. "클래식으로 되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전 클래식에서 어느 정도 커리어를 쌓고 갔기 때문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20년 넘게 성악을 했는데 한 가지만 하기에는 제 끼와 에너지가 넘쳐났어요.(웃음)"

역할 확장에 갈급했던 그는 크로스오버 활동으로 대중성이라는 자산을 얻게 됐다. 팬덤이 생기고, 이들과 소통하게 되면서 지금은 장르를 넘나드는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다고.

"크로스오버의 장점이 '이지 리스닝'이잖아요. 저희 팬들을 보면 트로트나 가요 쪽은 안 좋아하지만, 오페라는 또 어려운 분들이예요. 크로스오버를 통해 이분들을 클래식 쪽으로 끌어올 수 있겠다 싶었죠. 팬들과 만날 기회가 많은데 그럴 때 설명해요. 클래식 즐기는 방법, 오페라 관람 팁 같은 것들…. 클래식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아요."
"여러 재료 쓰는 요리사처럼, 경계없는 음악가 되고싶어요"
그는 성악을 할 때부터 늘 새로움에 목말라 있었다. 오페라를 할 때도 무대·조명에 관심을 가졌고, 괴짜 연출가의 파격적 시도를 좋아했다. "고전을 고전적으로만 해석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전 카운터테너지만, 다른 음역도 할 수 있다고 봐요. 제가 가장 도전하고 싶은 역할은 베이스 역할 '돈 조반니'예요. 무엇이든 제 방식대로 소화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이 있어요."

그는 '예술에는 바운더리가 없다'고 재차 말했다. 배역, 장르를 넘어서 활동할 뿐 아니라 오페라·연극 연출에도 뜻이 있다고. "성악만 고집한다고 모두가 다 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요리에도 재료가 정말 많잖아요. 나라마다 재료가 다르고, 같은 재료도 사용법이 다 다르죠. 한 가지 요리법만 고집할 이유가 없다고 봐요. 전 클럽 음악을 매우 좋아하거든요. 여러 장르를 활용하면 그만큼 사용할 재료가 많아지는 거니까 더 표현이 다양하고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요."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소년처럼 활기가 가득한 그는 오는 1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신년 음악회 '집시 카니발' 무대에 선다. 집시풍 음악을 주제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소프라노 이명주와 이혜진, 바리톤 김기훈과 최인식, 테너 김민석 등과 한 무대에 선다. 올해 하반기에는 바로크 음악을 대중적으로 친숙하게 재해석한 음반도 발매할 계획이다.

최다은 기자 ma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