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발레 속 노랑은 죽음을 뜻하는데…
레퀴엠(진혼곡)이 울리는 겨울이다. 국가 애도기간으로 한 해를 매듭짓고 한 해를 시작한다. 어수선한 시국 앞에서는 말이 많아졌지만, 생각지 못한 죽음과 이별 앞에서는 말은 채 형체를 갖추지 못하고 길을 잃었다. 형체가 없는 말은 존재할 수 있는가. 이 질문 끝에 마크 로스코의 그림들을 떠올렸다. 형체가 아니라 색으로 수많은 서사와 감정을 담아낸 그 그림들처럼 위로는 말의 형체를 지니지 않아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발레에서 죽음은 노란색이다. 장 콕토의 대본에 롤랑 프티가 안무한 작품 ‘젊은이와 죽음’(1946) 때문에 이런 인식이 생겼다. 이 작품은 피와 생명을 연상시키는 빨간 천 위에서 청바지를 입은 한 젊은 남성이 누워 있다가 춤을 추면서 시작된다.

사랑을 잃어버린 젊은이는 상실과 고통으로 몸부림 치고, 죽음을 상징하는 여성이 노란색 원피스를 입고 그를 방문한다. 여인은 잃어버린 사랑, 잡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표상이다. 동시에 그것을 잡고자 하면 죽음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끝내 그것을 놓지 못한 젊은이는 죽음에 유혹당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나는 젊은이의 침대 위에 놓인 붉은 천에서 로스코의 작품 속 말소리를 들었고, 노란 원피스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안에서 흔들리던 크롬옐로 색채를 보았다. 고흐는 그 색을 만들기 위해 납에 중독되어 갔고 죽음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 색 안에서 희망과 빛을 봤다. ‘젊은이와 죽음’에서 상실한 사랑을 놓지 못하고 그것만이 자신을 살아있게 만들 거라고 믿는 젊은이의 모습은 고흐와 닮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무엇이 우리를 죽게 하고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는가. 발레 ‘젊은이와 죽음’이 실존적 작품으로 남은 큰 이유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파사칼리아와 푸가 C단조(BWV 582)’를 반주 음악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은 유혹하는 여성과 젊은 남자의 치명적 사랑 이야기에서 벗어나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을 담은 작품으로 탄생할 수 있었다.

20분이 되지 않는 짧은 작품이지만 초연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지금까지도 종종 무대에 올라올 정도로 발레사에 중요한 레퍼토리로 남았다. 영화 ‘백야’의 시작 부분에 등장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당시 이 영화에 출연한 발레 무용수 미하일 바리시니코프는 이 작품으로 발레 애호가뿐 아니라 영화 팬과 대중에게도 각인됐다. 우리나라에서는 1980년대 한 운동화 브랜드 광고 속에서 배우 이종원이 의자 위에 올라서서 넘어가는 춤 장면이 화제가 됐는데, 바로 ‘젊은이와 죽음’에 등장한 장면을 패러디한 것이다.

지금 이별을 겪은 사람들이 상실과 고통의 강 끝에서 죽음이 아니라 다시 일상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그 기도 속에 작가 모리스 메테르링크의 6막 12장 희곡 ‘파랑새’를 떠올렸다.

발레 ‘잠자는 숲속의 미녀’ 3막 공주와 왕자의 결혼식 장면에서는 다양한 동화와 소설 속 캐릭터들이 축하의 춤을 펼치는데 이 디베르티스망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건 파랑새 파드되다. 메테르링크는 ‘파랑새’를 통해 행복이 멀리 있지 않고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는 것, 행복에 대한 성찰을 이야기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는 물레에 찔려 100년을 잠든 공주가 저주에서 깨어나는 판타지적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파랑새 파드되를 통해 공주와 왕자가 함께 살아갈 매일의 일상은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이며, 그 일상은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란 걸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