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 워홀도, 키스 해링도 먼지가 됐다.”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미술품 컬렉터 론 리블린이 14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전한 말이다. 그는 팰리세이드 자택에 보관하고 있던 200점 이상의 예술 작품이 불탔고, 수백만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정했다. 한점 당 200만달러 이상 가치의 앤디 워홀 작품 30여 점과 키스 해링의 작품 다수, 데미언 허스트 등의 대형 작품도 포함됐다.
리블린은 자신의 집에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의 작품인 '토템'(1988)을 소장하고 있었다.Tanya Barcessat
리블린은 자신의 집에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의 작품인 '토템'(1988)을 소장하고 있었다.Tanya Barcessat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미 서부를 대표하는 예술의 도시 LA 지역에서 발생한 역대 최악의 산불 진압률이 9일째 10%대에 머물면서 전 세계 예술계의 긴장감과 비애가 커지고 있다. 개인 컬렉터들의 소장 작품들의 피해 규모가 계속 커지고 있는 데다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원본 악보 약 10만 점을 포함해 파블로 피카소의 명작 등도 불에 타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게티미술관, LA카운티미술관(LACMA) 등을 포함해 예술관련 기관과 재단은 15일 긴급 구호 자금을 마련해 LA의 예술가와 예술 유산을 지키는 데 나섰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침통한 예술계 …피해규모 추산 불가

LA는 영화의 상징인 헐리우드 지역을 포함해 미국을 대표하는 음악과 미술의 중심지였다. 미술관만 100여 개가 넘는다. 이번 화재로 100년 이상 자리를 지킨 유서 깊은 유대인 회당인 '패서디나 유대인 사원', 수 많은 영화의 세트장으로 사용된 팰리세이즈 차터 고등학교 등이 파괴됐다. 게티뮤지엄과 게티빌라, 해머뮤지엄, 헌팅턴도서관, 브로드미술관, 노턴사이먼 미술관 등도 한시적으로 문을 닫고 화재 진화 단계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상태다. 가고시안 갤러리, 리슨갤러리 등 대형 갤러리들도 1월 초 예정됐던 전시 개막 등도 무기한 연기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20세기 가장 혁신적인 작곡가 아놀드 쇤베르크의 악보 등 10만 점도 파괴됐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아들인 래리 쇤베르크(83)는 '벨몬트'라는 출판사를 세워 쇤베르크의 악보를 보관, 임대하고 있었는데 이번 화재로 건물 전체가 소실됐다. 래리 쇤베르크는 "원본 악보는 파괴되지 않았지만, 벨몬트 컬렉션이 없어져 앞으로 몇 달 간 쇤베르크의 작품을 연주할 오케스트라, 실내악단, 독주자들에게도 문제가 될 수 있다"며 "잔혹하고 끔찍한 일이다"고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나홀로 멀쩡한 게티박물관

LA 미술계의 상징인 게티박물관은 이번 산불에 특별 방어에 나서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빈센트 반 고흐의 붓꽃, 렘브란트의 그림 다수와 초상화 등 귀중한 컬렉션과 인류 유산 6만여 점을 보유하고 있어 예술계의 관심이 가장 많이 쏠린 곳 중 하나. 1997년 문을 연 게티박물관과 게티빌라는 가장 큰 피해 지역 중 하나인 퍼시픽 팰리세이즈 지역에 위치해 있는데, 게티 빌라 동쪽 벽에서 1.8m 이내 불길이 치솟았지만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유명 건축가 리처드 마이어가 설계 단계부터 화염이 번지지 않도록 자재를 엄선해 설계했고, 주변 정원에도 아카시아 관목과 참나무 등 불연성이 낮은 식물을 심었다. 게티 박물관 내부는 공기 여과 시스템이 장착돼 연기와 불씨가 내부로 침투하는 것을 방지하도록 설계됐다. 게티재단 관계자는 "박물관 직원 45명이 24시간 교대로 불씨를 감지하고 화재를 진압했으며, 산불이 가까이 왔을 때 박물관의 스프링클러가 자동으로 작동해 잔디를 적시며 방재에 힘썼다"고 했다. 게티 박물관은 2009년과 2017년 산불 위험에 처한 바 있다. 이후 수백만 달러를 투자해 방재 시스템을 강화하고 갤러리에 화재 예방 장치를 추가하며 건물 구조를 개선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예술가 지원하는 기금 조성

이번 화재는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예술계 손실로 기록될 전망이다. 미술 보험 전문회사 리스크스트래티지스의 크리스토퍼 와이즈 부사장은 "수 없이 많은 수십억원대의 미술품이 위협받고 있다"며 "허리케인 샌디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이 예상되는데, 재앙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전했다. 당장 내달 20일부터 LA산타모니카공항에서 예정돼 있던 아트페어 '프리즈LA'의 개최 여부도 불투명하다. 프리즈 측은 "공항에는 화재 피해가 보고되지 않았지만, 도시 인프라가 극심한 피해를 입고 수천 명의 이재민이 발생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발생한 산불로 수 조원대의 예술품이 소실되거나 피해를 입을 것으로 추산된다. Getty Image/AFP
한편 게티재단을 중심으로 로스앤젤레스카운티미술관(LACMA) 등 주요 박물관과 스티븐 스필버그 재단, 포드재단, 앤디워홀시각예술재단 등은 캘리포니아 산불로 피해를 입은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1200만달러(약 174억9000만원)을 출연해 'LA예술커뮤니티 산불릴리프 펀드'를 만들어 LA 화재로 인해 주거지, 스튜디오, 생계를 잃은 모든 분야 예술가와 예술 종사자들을 지원하기로 했다. 캐서린 E.플레밍 게티재단 최고경영자(CEO)는 "LA는 활기 넘치는 문화예술의 중심으로서 긴 역사를 지니고 있고, 예술가들이 이 땅을 떠나거나 그들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마이클 고반 LACMA 관장도 "이렇게 빠른 시간에 흩어져 있던 예술계가 하나의 뜻으로 모이게 된 획기적인 일"이라며 "산불 피해를 함께 애도하고, 예술가와 예술 생태계가 복원될 수 있도록 힘을 모아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김보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