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중 일본은 종신고용과 경직적 노동시장, 관계지향적 문화로 인해 혁신과 기업 생산성이 저하되고 있다. 외부 충격을 통한 지배구조 개선과 창업·혁신 촉진이 반드시 필요하다.
[한경ESG]-인베스트먼트
세계에서 가장 높은 멀티플을 인정받는 미국 증시와 그렇지 않은 동아시아 국가의 가장 큰 차이는 노동 관행과 인종·종교·문화적 요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결국 기업문화와 지배구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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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증시 전문가들은 지역별로 리스크 선호 혹은 가치 평가 배수 차이, 기업지배구조 문제 등을 지적한다. 하지만 지역마다 다른 멀티플과 지배구조 변천사 등 근본적 원인에 대한 분석이 반드시 필요하다. 특히 일본은 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밸류업 정책을 도입했지만, 아직까지 정책적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잘 살펴야 한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3국의 거버넌스 점수, 인권 점수, 경영 점수, 주주 권리 점수, 직원 만족도를 분석해보면 데이터 이면에 숨겨진 본질은 각 문화권에서의 기업과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 구성원의 의사결정 방식 등이다. 한중일 동아시아 3국의 주요 대기업 인력 구성의 가장 큰 특징은 외국인에 대한 배타성이다. 이들 국가 모두 외국인 정규직 근로자 비중이 낮기 때문에 기업문화에 지역 특수성이 더해질 수 있다.
북미권과 비교할 때 동아시아의 지역 특수성은 ‘호프스테더 문화’에서 드러나는 낮은 개인주의 성향이다. 북미는 사적인 관계에서 부탁을 잘 들어주지 않는 편이고 관계 지향적이지 않은 반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의사결정 방식이 정반대다.
예로, 친한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탔는데 제한속도를 넘어 사람을 다치게 할 경우 목격자가 없으면 친구를 위해 기꺼이 위증해주는 것이 동아시아적 행동 양식이다. 또 관계가 친밀한 사람이 운영하는 음식이 맛있다고 거짓 리뷰를 작성하고, 회사 내부 정보도 서슴없이 제공하는 것은 관계 지향적 문화가 지배적인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꽌시(관계)를 중시하는 중국, 온정주의가 강한 한국, 겉과 속이 달라 네마와시(사전교섭)를 중시하는 일본의 기업문화와 의사결정 방식 차이는 동아시아 지배구조 특수성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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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업 수익성 제고·인적자본 강조 왜
일본의 채용시장은 신규 졸업자를 일괄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때문에 인력 교류 방식이나 경력으로 이직을 하는 사례는 거의 드물다. 예컨대 기업의 채용 공고 조건에는 취업 경험이 없어야 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즉 다른 회사의 사고방식에 물든 사람은 뽑고 싶지 않다는 취지로 보인다.
동아시아 노동시장은 대체로 경직돼 있지만, 경력 이직에 대한 배타성은 일본이 가장 두드러진다. 경력의 첫걸음을 폐쇄성으로 시작하는 일본적 사고방식은 번거로운 품의 절차, 사전적 정보 공유에 많은 공을 들이는 네마와시로 나타나는데, 이는 기업혁신을 늦추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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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entrepreneur)는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혁신은 실패 위험에도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로부터 나온다. 스탠퍼드대 로버트 서튼 교수는 독창적 아이디어 창출 분야를 두고 “양이 질을 예측하는 가장 정확한 지표”라며 실패가 많더라도 이것이 혁신의 원천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이 실수나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기업문화에서 혁신이 나오기 힘든 이유이다.
일본은 세계 지식재산권기구(WIPO)가 산출하는 2024년 글로벌 혁신 리더 점수에서 동아시아 4개국 중 중국보다 낮은 점수로 꼴찌를 기록했다. 종신고용으로 도전하지 않는 기업문화와 만성적으로 고령화된 인구구조 결과다. 저출산·고령화를 겪는 나라가 저성장에 진입하는 이유는 청년층의 고유 특성인 기업혁신과 사회 역동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낮은 평가를 받은 세부 항목은 스타트업 생태계와 디지털 혁신 부문으로 이제야 정부 지원책이 나오고 있다.
일본은 인구 절벽을 맞아 실업률은 낮고 기업들은 오히려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나 낮은 노동생산성과 실질임금 감소로 가계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기업 종사자의 구매력은 개선되지 못했다. 일본 밸류업이 기업 수익성 제고와 인적자본을 강조하는 이유는 기업 수익성이 낮고 종신고용과 연공서열로 생산성이 없는 사내 실업자(마도기와 오지상)를 대량 양산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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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네와 다테마에 기반한 일본인의 분리적 사고방식은 모순되는 경제 현상으로 나타난다. 겉으로는 노동시장이 좋아 보이지만, 혁신 부재에 따른 낮은 노동생산성이 실질임금 하락으로 나타난다. 증시가 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일본은행의 인위적 ETF 매입과 수출 대기업을 제외하면 오른 게 없다는 지적이다. 일본 내수 기업들은 경기 부진에 연간 기업 도산 건수 1만 건으로 11년래 최악을 기록했다.
일본 노동시장에 일손이 부족해진 이유는 내수가 좋아서가 아니라 인구 구조상 생산가능인구가 구조적으로 하락하는 인구 오너스(demographic onus) 탓이다. 일본 인구 통계 추계에 따르면 이 문제는 향후 구조적으로 악화되며 인구는 점점 감소해 2050년 부근 1억 명을 하회할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 버블 붕괴 후 사회에 진출해 정규직이 되지 못하고 장기 저성장 시기 청년 시절을 보낸 로스제네(잃어버린 세대)는 프리터족을 전전하다 50대에 진입했다. 혁신을 이끌어야 할 주체가 오히려 사회문제로 전락한 것이다. 평생 부모에게 의존해온 이들과 그 부모를 묶어 8050문제라고 하는데, 80대 부모와 50대 자녀가 함께 빈곤 위기에 직면했다는 뜻이다.
이제 일본은 일손이 부족해 대학교 4학년이 되면 95% 정도 취업이 확정되지만 젊은 세대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과도한 경쟁에 지친 이들은 소비에 관심이 없고 현실에 안주하기에 사토리 세대, 이른바 득도로 불린다.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이 구조적으로 성장했던 2000년대에 저성장을 지속해 실질임금이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황기를 보낸 앞선 세대와 비교할 때 과도한 정부부채를 떠안고 정규직 기회도 박탈당한 세대에 대한 불균형 심화가 지적되는 이유다.
일본이 인적자본에 집중하는 이유
일본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적자본 ETF를 상장해 운용하고 있으며, 정책적으로 인적자본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노동시장이 경직적이기에 인력을 외부에서 충원하기보다는 내부에서 재교육했는데, 종신고용 관행은 결과적으로 사내 실업자 양산으로 이어졌다.
일본인의 인적자본에 대한 강조는 역설적으로 사내 인력을 유연하게 재배치할 수 없는 경직적 문화의 결과로 구조적으로 낮아져온 노동생산성 저하, 혁신의 부재를 보여줄 뿐이다. 외국인의 폐쇄적 문화 탓에 이민자와의 일자리 경쟁 강도가 낮은데, 2025년 현재 인공지능(AI) 혁신으로 발생하는 노동시장의 큰 변화는 그동안 일본이 강조해온 인적자본의 유휴 설비화다. 자동화가 가능한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생산성 향상에 많은 노동 투입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규 졸업자 일괄 채용, 내부 승진, 종신고용 결과 일본 기업의 경영진은 회사 내부에서 성장하며, 사외이사 비중이 낮다. 그 결과 주주가치 극대화보다는 조직 안정성과 이해관계자를 우선하는 종업원 자본주의가 발달했다. 미국식 주주 자본주의와는 상이한 성격이 증시의 저평가 요인으로 지목되면서 정부와 거래소는 사외이사 확대와 주주가치 제고 목표 등 각종 밸류업 정책을 진행하고 있다.
일본식 의사결정 과정은 공식 기구보다는 사전 조율로 진행되기에 종업원과 내부자 의견이 강하게 반영된다. 외부 기구 결정 전 충분한 사전 조율을 하기 때문에 이사회나 주주총회 결정은 형식적 승인에 가깝고, 투명한 의사결정 절차를 중시하는 서구식 지배구조와 큰 대비를 이룬다.
이러한 관성으로 말미암은 일본 기업문화와 지배구조는 외부 충격 없이는 변화가 더딜 수밖에 없다. 특히 정부와 거래소의 정책만으로는 강한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기업경영 방식의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행동주의 투자 등 큰 외부 충격 없이는 변화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장기 저성장을 겪은 젊은이들이 희망을 잃었고, 노력과 노동이 가치가 없다고 여기며 창업이나 혁신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근본적 문제를 덮어두고 자기자본이익률(ROE) 상승을 기대하는 것은 변화를 외면하는 행동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