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민감국가' 침소봉대하는 정치인들
미국 에너지부가 올해 초 한국을 ‘민감국가’로 지정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정치권에서 논란이 커지자 조셉 윤 주한 미국대사대리가 진화에 나섰다. 그는 지난 18일 한 행사에서 “에너지부의 실험실에서 일부 민감한 정보가 잘못 취급된 사례가 있었던 게 원인”이라며 “큰일이 아니다(it’s not a big deal)”고 했다.

내막은 이렇다. 미 에너지부 감사관실은 지난해 초 ‘산하 기관인 아이다호국립연구소(INL)의 한 직원이 원자로 설계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한국으로 출국하려 했다’는 내용이 담긴 감사보고서를 냈다. 민감국가 지정은 이 보고서의 후속 조치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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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L은 국내 원자력 연구기관과 장기간 협업해 온 곳이다. 10여 년 전엔 한국 연구진이 개발에 성공한 ‘연구로용 핵연료’의 성능 테스트를 INL에서 진행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에 연루된 INL 직원은 한국인으로 당시 연구에 참여한 인물이다. 해당 직원은 1년여 전쯤 한국에 잠시 귀국하려 했는데, 당시 소지한 개인 노트북에 원자로 안전 해석 코드가 담겨 있던 게 미 보안당국에 적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원자력업계는 해당 코드에 대해 미국에서는 여전히 민감한 정보로 분류하고 있지만 국제적으로는 이미 많이 알려진 ‘오픈 시크릿’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해당 직원이 크게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해당 직원은 INL과의 계약 종료 후에도 미국 내 다른 기업에 정상적으로 취업한 것으로 알려졌다. 원자력업계 관계자는 “미국 에너지부로서는 자체 감사보고서가 나왔으니 후속 절차를 밟았을 뿐인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두 달간 인지하지 못한 건 문제다. 하지만 정치권이 정확한 원인 파악 없이 정쟁을 위해 사건을 침소봉대하는 건 자해에 가깝다는 평가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민감국가 지정 원인이 “여권의 핵무장론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권영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대표의 반미 노선이 원인”이라고 맞받아쳤다.

정치권 공방과 달리 미 에너지부는 올초 산업통상자원부와 한·미 원전 수출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MOU)을 맺었고, 한국수력원자력과 미국 웨스팅하우스의 지식재산권 분쟁도 해결됐다. 그런데도 한국의 책임 있는 정치인들이 공방을 이어가자 보다 못한 미국 대사대리가 나섰다. “마치 큰 문제인 것처럼 상황이 통제 불능으로 된 것이 유감”이라고 했다. 정쟁이 너무 쉽게 국경을 넘는 한국 정치에 대해 그가 어떤 생각을 했을지, 얼굴이 화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