션 베이커라는 감독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플로리다 프로젝트>(2018) 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당시 국내에서도, 자국인 미국에서도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션 베이커 감독에 대한 별다른 정보 없이 언론 배급 시사를 통해 영화를 봤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은 영화의 주인공인 소녀, ‘무니’가 사회복지사로부터 탈출해 디즈니랜드로 향하는 대목에서 너무 많이 울어서 결국은 상영관을 나와야 했다는 것이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조금은 냉정하게 볼 수 있는 상태에서 영화를 다시 보았고 이후로 션 베이커는 나의 영화인물사전에 영구히 등재된 인물이 되었다.
션 베이커 감독 / 사진. ⓒIMDb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생계를 위해 모텔에 살며 매춘을 하는 미혼모 엄마와 딸을 중심으로 하는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하층민을 위해 만들어진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담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오랜 시간 동안 비슷한 주제를 추구하고 있는 켄 로치나 다르덴 형제와 같은 감독들과는 현저히 다른 캐릭터와 이야기 전달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션 베이커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낮은 곳에 있지만 절망적이거나 우울하지 않다. 절망과 우울의 극단, 예를 들어 다르덴 형제의 <내일을 위한 시간> (2015) 의 ‘산드라’ (마리옹 꼬띠아르)가 복직을 위해 동료들을 찾아가서 비참하고도 고통스러운 애원의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면 베이커의 캐릭터들은 무언가로부터, 혹은 무모한 것에서라도 즐거움을 찾고 그만의 유머를 유지해 가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베이커의 캐릭터는 마치 누더기를 걸친 채플린처럼, 처연하지만 코믹하고 코믹하지만 애잔하다.
영화 <내일을 위한 시간>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고 나서, 나는 베이커의 이전 작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충격은 감탄으로, 그리고 (이미 데뷔한 지 10년이 지나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새로운 천재의 탄생을 목도한 듯한 전율로 변이했다. 그가 <플로리다 프로젝트> 전에 찍은 작품, <탠저린>(2015)은 트렌스젠더 여성이자 성 노동자인 두 친구, ‘신디’와 ‘알렉산드라’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신디의 남자친구를 찾기 위해 LA를 누비며 벌이는 하룻밤 해프닝을 그린 소동극이다.
ADVERTISEMENT
아이폰으로만 촬영한 이 작품은 촬영도, 대사도 소란스럽기 그지없지만 시종일관 웃음이 터지는 코미디의 이면에서 베이커는 소수자들을 대하는 이 세상의 냉혹하고도 기만적인 행태를 이야기한다.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그랬던 것처럼 궁극적으로 영화는 이 사회를 향한 ‘쓴소리’를 외치고 있지만 그러한 부조리는 디즈니랜드의 알록달록한 풍경, 혹은 탠저린(귤)의 귀여운 형상과도 같이 사랑스러운 이미지와 캐릭터들로 전달된다.
영화 <탠저린> 스틸컷 / 사진. ⓒIMDb
비슷한 맥락에서 그의 2021년 작품, <레드 로켓> 역시 베이커만의 하층민 랩소디를 이어 나가는 작품이다. 칸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었던 <레드 로켓>은 LA에서 포르노 배우로 나름대로 인정을 받았던 ‘마이키’(사이먼 렉스)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이다. 그는 이런저런 사건으로 빈털터리가 되자 오랜 기간 별거 중이었던 아내의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와 그녀의 엄마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족을 버리고 떠났던 남편의 뻔뻔함에 치를 떨며 그를 내친다. 그러나 무릎을 꿇고 사정하는 마이키에게 결국엔 집세를 분담하는 조건으로 잠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하게 된다.
며칠 동안 대마초를 팔며 동네를 전전하던 마이키는 한 도넛 가게(도넛 가게는 전작, <탠저린>에서도 영화의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에서 일하는 십 대 소녀, ‘스트로베리’를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는 배우로 데뷔시켜 준다는 허풍으로 소녀를 유혹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녀와 야반도주를 감행한다.
영화 <레드 로켓> 스틸컷 / 사진. ⓒIMDb
앞에 서술한 베이커의 전작들, 그리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전직 포르노 스타를 주인공으로 하는 <레드 로켓>과 작년 칸 영화제의 최고 영예인 황금 종려상과 올해 아카데미에서 4관왕을 기록한 <아노라>까지 션 베이커는 놀라울 정도로 일관성 있게 하층민 노동자, 정확하게 말하면 하층민 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고수하고 있다. 베이커는 <탠저린>을 포함 네 개의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성 노동자, 혹은 성행위가 직업인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하는 주제적 특성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성 노동자’의 일상에 주목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