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비 6000만 달러(약 900억원)짜리 영화를 비상업독립영화라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예술영화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케이트 블랜쳇, 마이클 패스벤더 주연의 <블랙 백>은 비싼 예술영화다. 영화가 추구하는 바가 그렇다. 어떤 작품을 두고 예술영화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은 바로, 그 추구하는 바의 가치이다. 전설의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 <블랙 백>은 작가주의형 상업영화이자 웰 메이드 예술영화이다.

영화 <블랙 백> 제목에서 ‘블랙 백’이란 용어는 기밀, 보안이라는 얘기이다. 첩보원들은 무슨 얘기마다 "그건 블랙백이오"라며 말을 끊는다. 실제로 블랙백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상대를 차단하려는 수단의 말투일 수도 있다. 주인공 부부인 조지 우드하우스(마이클 패스벤더)와 캐슬린(케이트 블란쳇)이 그렇다. 남편은 영국 SCIF(Sensitive compartmented information facility·민감특수정보국)의 내사 담당이고 아내는 현장 요원이다. 둘은 금실이 좋기로 유명하다. 싸우지를 않는다. 자기가 지켜야 할 영역은 철저하게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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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상대가 알고 있다는 것을 다시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다시 상대가 알고 있고, 또 알고 있고 또 알고 있고의 연속과 반복이다. 마치 엘리베이터 속 양옆의 거울에 비친 내가 거울 속의 거울 속의 거울 속에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근데 이건 첩보원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릇 모든 부부, 모든 남녀 연인들이 공통으로 가진 심리의 복잡다단성이다.
영화 '블랙 백'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블랙 백'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그래서인지, 영화 <블랙 백>은 단순 첩보 스릴러가 아니다. 초반부에는 약간 치정 스릴러처럼 되다가 나중에는 완벽한 심리 스릴러가 된다. 첩보든 치정이든 심리 스릴러든 이게 ‘예술 점수’를 높게 따내려면 관객을 향한 눈속임 장치의 정교함이 아니라 관객에게 미끼를 던지는 수완의 솜씨가 좋아야 한다.

눈 밝은 관객은 중간쯤 이게 무슨 얘기인지, 누가 범인인지를 알아챈다. 고도의 감각을 지닌 스릴러는 관객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첩보원들처럼) 역이용해서 반전과 의외의 인물을 범인으로 밝혀내게 하는 것이다. 영화 <블랙 백>이 바로 그렇다. 이 영화는 단 한 순간도 한눈을 팔거나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어도 흐름을 놓치기 쉽다. 눈을 부릅뜨고, 한껏 집중해서 봐야 할 작품이다. 오랜만에 승부욕을 자극하는 영화이다.

<블랙 백>이 갖는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세버러스라는 신종 기술 정보 때문이다. 원격으로 원자로를 용해시킬 수 있는 기술로 이것이 유출된 것으로 정보국 정보망에 걸린 상태이다. 푸틴 체제의 러시아에는 축출된 군부 강경파 바딤 파블리츠크라는 장군이 있고, 스위스 어디에선가 연금중으로 엄중 감시를 받고 있는데, 그의 측근인 쿨리코프가 그를 빼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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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세버러스를 이용해 러시아 원자로를 위협하려 한다. 그런데 이 쿨리코프를 사전에 만난 것이 캐슬린으로 보인다. 캐슬린은 다른 작전명으로 700만 파운드(132억8천만원)를 유용한 것으로도 보인다. 조지는 캐슬린의 뒤를 캐기 시작한다. 사랑이냐 애국이냐(보다 반역이 아니냐가 더 정확한 말이 될 것이다. 애국 같은 것보다 영화 속 첩보원들은 반역죄로 고소당해 35년 형을 받게 되는 것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영화 '블랙 백'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블랙 백'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의 시작과 끝은 같은 형식으로 돼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일종의 양괄식이다. 처음 시작은 조지가 아내를 포함해 5명의 용의자를 자기 집 디너에 초대하는 것이다. 데이터 분석가 및 위성 추적사가 2명, 곧 클라리사(마리사 아벨라)와 프레디(톰 버크)가 있고, 정보국 내 정신분석의인 조이(나오미 해리스)와 첩보요원인 지미 스토크스(레게 장 페이지)가 있다. 이 넷은 각각 둘씩 연인 관계이거나 섹스 파트너이다.

주인공 조지의 아내인 캐슬린까지 이들 다섯은 모두 동기가 충분한 용의자이다. 연인 관계들인 척하지만 다들 날이 서있다. 정보국 내 사내 섹스 파트너들인 만큼 서로가 서로를 잘도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프레디는 한참 나이가 어린 클라리사의 눈을 속이며 다른 여자와 동침 중이다. 근데 그런 게 다 뭐가 중요한 것인가. 지금은 세버러스 기술 정보를 누가 빼갔는가가 중요하다. 하지만 아무도 서로를 못 믿는 상황이라면 동기의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이 5명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는 개연성을 확 깔고 간다. 그리고 양괄식인 만큼 마지막에 영화는 이들 6명을 다시 한자리에 모이게 한다. 조지와 용의자 5명. 의외의 인물이 모든 음모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첩보극의 외피를 쓰고 있는 만큼 딱 한발의 총격이 벌어진다. 일은 수습되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평온한 척한다. 마치 세상이 곧 망할 위기이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냥저냥 잘 굴러가는 것과 같다. 이 영화의 톤앤매너가 바로 그런 정중동이다. 격렬함이 감춰진 평온함. 거기에 바로 섬뜩함이 있다.
영화 '블랙 백'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영화 '블랙 백' 스틸컷 / 사진출처. IMDb
두 가지 실제 사건을 영화 배경의 모델로 삼는다. 하나는 원자로를 원격으로 녹인다고 하는 건데 이렇게 되면 방사선 누출 사고가 일어난다. 지금까지 최악의 원전 사고는 바로 체르노빌이다. 일본 후쿠시마는 천재와 인재가 겹쳤지만 체르노빌 사태는 백퍼센트 인재이다. 1986년 소련 체제의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로 80만명 이상이 방사능에 피폭됐다. 이 사고는 궁극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러니까 영화를 잘 따라가다 보면 허구의 인물 바딤 파블리츠크가 원하는 것은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해도 푸틴 체제의 전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야 권력을 탈취하려는 목적이지만 서방 정보부들은 그것을 이용해 푸틴 정권을 궁지에 몰 수 있게 되면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할 수 있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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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결국 이 영화에서도 가치관은 '대립'이 주제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을 위해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리느냐, 대의가 무엇이고 소의는 또 무엇이냐에 가치를 판단하게 만든다. 주인공 조지가 밝혀내려는 음모의 주체 역시, 바로 그 점 때문에,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반역죄인가 그렇지 않은가로 판단할 수가 있다. 진리는 늘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인데 그 상대성 역시 매 순간, 매 시대마다 늘 변화한다는 점에서 판단의 어려움이 주어진다. 영화 <블랙 백>은 그런 면에서 고단백의 정치 사회적 사유를 요구한다. 그 ‘뇌세척’의 느낌이 신선하고 시원한 작품이다.
영화 '블랙 백'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블랙 백' 스틸컷 /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런던이 배경인 만큼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패션이 삼삼하다. 엘렌 미로즈닉이 담당했다. 정보국 총책임자 스티클리츠(피어스 브로스넌)의 더블 자켓과 백발의 헤어 스타일은 그의 연기를 넘어설 만큼 댄디함의 최고조이다. 케이트 블란쳇의 선글라스 패션은 심각하게 매혹적이다. <블랙 백>은 배우들만으로도 치명적인 매력이 돋보이는 첩보 스릴러이다. 아내 캐슬린은 한껏 몸이 달아오른 채 남편인 조지를 침대로 오라 한 후 그의 몸 밑에서 이렇게 말한다. “당신, 나를 위해서 살인도 할 수 있어?” 남자가 말한다. “당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첩보원의 이 말은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인가. 부부간의 이런 말은 대체 어디서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진실은 700만 파운드, 130억원이 은행 계좌에 숨겨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진실은 어디에 코 박고 있는지 찾아보기를 바란다. 밴드 자우림의 리더 김윤아는 언젠가 멤버끼리 연애를 하는 것은 그룹 해체의 지름길이라고 했다. 정보국 내 사내 연애도 마찬가지이며 어디든 같은 얘기이다. 조지와 캐슬린은 어떻게 될 것인가. 자못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블랙 백>이 첩보 스릴러라는 장르를 넘어서서 보편적 삶의 원리를 그려내는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영화 <블랙 백> 메인 예고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