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규제의 덫…혁신 사라진 韓금융
요즘 학생들은 생소할 수 있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는 초등학생들이 국가 정책을 홍보하는 포스터를 만들곤 했다. 그중 우수한 작품을 만든 학생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가장 흔한 주제 중 하나가 저축 장려였다. 어린 마음에 ‘열심히 저축하면 우리나라가 빠르게 성장해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럴 만도 했다. 경제개발 초기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자금 부족에 시달렸고, 주로 외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정부는 국내 저축을 최대한 장려해 경제 성장을 위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집중했다. 당시 금융기관들은 독자적으로 자금을 배분할 수 없었고, 정부의 산업정책을 지원하는 도구로 활용됐다. 소위 ‘관치금융’이다.

ADVERTISEMENT

하지만 금융 부문이 정부 지시에만 의존하다 보니 자율적인 발전이 어려웠다. 정부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금융정책을 내세워 금융 발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방식이 낯설었다. 미국에서 경제학을 공부할 당시 ‘금융정책’이라는 용어조차 접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선진국에 금융정책이 존재한다면 그 초점은 금융 안정을 유지하는 것이다. 선진국들은 역사적으로 크고 작은 금융 위기를 겪었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한 정책적 노력을 꾸준히 기울여 왔다. 이런 환경 속에서 금융기관들은 자유로운 경쟁과 혁신을 통해 성장했다. 이런 방식이 진정한 금융 발전 방안이라고 하겠다.

최근 한국의 금융정책도 이 같은 선진국의 경험을 반영해 금융 안정을 우선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는 긍정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 안정의 개념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금융 안정이란 금융 위기와 같은 대규모 불안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지, 금융권 내에서 단 하나의 문제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 금융당국의 태도를 보면 마치 ‘조금의 금융 불안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는 듯하다.

문제가 발생하면 금융당국이 즉각 개입해 사태를 수습하고, 새로운 규정을 마련해 같은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조치한다. 이는 매우 효과적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하지만 당국이 모든 문제의 소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전 규제를 통한 문제 해결이 금융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ADVERTISEMENT

더욱 우려되는 점은 이 같은 개입이 금융기관의 정부 의존성을 강화해 금융업 발전을 저해한다는 점이다. 규제가 반복되면 금융기관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정부 지침을 따르는 것에만 집중하게 된다. 새로운 규정을 준수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창의적인 문제 해결이나 자율적인 리스크 관리에는 소홀해질 수 있다.

금융당국이 이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과거 자금 배분을 정부가 주도하던 ‘관치금융’의 영향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도해야 금융이 발전한다고 보는 시각이 강하다. 둘째, 국민의 기대도 한몫한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를 향한 비난의 화살이 끊이지 않다 보니 금융당국은 사소한 문제까지 사전에 차단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셋째, 정책 감사의 부담이다. 조금이라도 불안 요소가 보이면 사전에 개입해 문제를 차단하려는 이유다. 최근 정부가 비트코인 같은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적극적으로 들이지 않는 것도 만약 제도화한 후 문제가 발생하면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부담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혁신에는 본질적으로 위험이 따르며 그 과정에서 실패는 불가피하다. 금융회사가 스스로 책임을 지고 이런 위험을 해결할 때 진정한 혁신이 가능하다. 작은 실패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과도한 규제로 막아버린다면 금융회사들은 혁신은커녕 규정 준수에만 몰두할 것이다. 금융위기와 같은 금융시스템 리스크를 사전에 대비해 금융시스템이 지속되게 하는 것은 금융 안정의 핵심 기능이다. 하지만 금융 안정이 완전한 무결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작은 문제조차 용납하지 않으려고 과도하게 개입한다면 금융기관의 자율성과 혁신은 저해될 수밖에 없다. 금융기관이 자율적인 문제 해결 능력을 키울 수 있어야 진정한 의미의 금융 발전도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