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간 사라졌던 클림트 걸작이 돌아왔다…미술계 '흥분'
‘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중요한 예술적 분기점은 1897년이다. 주류 아카데미즘 미술과 결별하고 “각 시대엔 그 시대 예술을, 예술엔 자유를!”이라는 구호와 함께 ‘빈 분리파’라는 새로운 미학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 클림트 화풍의 변화를 보여주는 첫 작품으로는 ‘소냐 닙스의 초상’(1898)이 꼽힌다.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클림트의 작품 한 점이 최근 세상에 나와 미술계를 뒤흔들고 있다.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열린 ‘테파프’(TEFAF·유럽미술박람회) 아트페어에서 공개된 초상화다. ‘윌리엄 니 노르테이 도우오나 왕자의 초상’(이하 왕자의 초상·사진)이란 제목의 그림으로, 1897년 그려진 것으로 확인됐다. 초상화로 수많은 걸작을 남긴 클림트가 가장 이른 시기에 완성한 작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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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아트뉴스 등 해외 미술전문 매체에 따르면 지난 15일부터 닷새간 열린 테파프 아트페어에 클림트의 초상화 작품인 왕자의 초상이 출품됐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갤러리인 비너로이터&콜바허 갤러리(W&K)가 출품한 이 작품은 무려 1500만유로(약 240억원)의 가격표가 붙었다. 판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60㎝ 높이의 다소 작은 작품 크기에 오염, 훼손이 상당한데도 높은 가격이 책정됐다. 가치가 남다르다는 평가에서다. 오스트리아 벨베데레미술관이 클림트의 명작 ‘키스’에 영구반출 금지 딱지를 붙이는 등 19~20세기 최고 예술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클림트의 그림은 부르는 게 값이다. 클림트의 마지막 초상화로 알려진 ‘부채를 든 여인’이 2023년 영국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8330만파운드(당시 약 1413억원)에 낙찰된 게 대표적이다.

왕자의 초상이 더욱 특별한 점은 거의 100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유실 초상화라는 데 있다. 이 작품은 1930년대 이후 사라진 것으로 여겨져 왔다. W&K에 따르면 이 작품은 1923년 클림트의 유산을 놓고 진행한 경매에서 판매된 후 1928년 에르네스티네 클라인 부부가 전시에 대여한 것을 끝으로 기록이 없다. 유대인이던 부부가 나치 독일이 빈을 점령하기 직전 피신한 이후 작품의 행방도 묘연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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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의 초상이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작품의 내재적인 가치에 있다. 이 작품이 클림트가 빈 분리파를 결성한 첫해에 제작됐다는 점에서다. ‘디오니소스 제단’(1886)이란 작품으로 황제상까지 거머쥘 만큼 전통적 양식으로 인정받은 클림트는 시대를 선도하긴커녕 변화도 뒤따르지 못하는 예술에 염증을 느꼈다. 클림트는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등 당대 떠오르던 경향을 받아들이면서 장식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는데, 이 작품에서 이런 태도가 나타난다.

이를 보여주는 가장 단적인 예가 작품 배경에 있는 꽃이다. 클림트가 추구한 우아한 장식미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실제로 ‘소냐 닙스의 초상’에서도 어두운 고동색 뒷배경에 꽃이 등장한다. 이후 클림트의 그림은 1900년대 들어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1902)이나 ‘유디트’ 시리즈처럼 화려하게 바뀐다. 왕자의 초상에 나오는 다소 소극적인 꽃은 이런 클림트 장식미의 시발점이 되는 셈이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클림트 연구자로 갤러리와 함께 작품의 진품 여부를 확인한 미술사학자 알프레드 바이딩어는 “이 작품은 클림트 예술 발전의 새로운 단계를 예고한 작품”이라며 “특히 배경에 사용된 상징적인 꽃 모티프는 이후 그의 초상화에서 일관되게 발전하는 핵심적인 양식 요소가 된다”고 밝혔다.

유승목 기자 mo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