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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반으로 파리를 그리는 19세 피아니스트 김세현 "음악은 음과 음 사이를 듣는 일"
단독 인터뷰
'2025 롱 티보 콩쿠르 우승' 피아니스트 김세현
미 보스턴 NEC, 하버드대 영문학 전공
워너클래식서 데뷔 앨범 <쇼팽, 포레> 발매
9월엔 리사이틀… 정명훈과 도쿄·파리로
'2025 롱 티보 콩쿠르 우승' 피아니스트 김세현
미 보스턴 NEC, 하버드대 영문학 전공
워너클래식서 데뷔 앨범 <쇼팽, 포레> 발매
9월엔 리사이틀… 정명훈과 도쿄·파리로
김세현은 지난해 파리에서 열린 세계 최고 권위의 롱 티보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당시 심사위원단이 ‘2위 없는 1위’를 선언하며 클래식계를 뒤흔들었다. 우승 이후 김세현은 프랑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파리의 개선문, 에펠탑,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등 파리를 상징하는 기념비적 공간이 모두 그의 독주 무대가 됐다.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는 그에게 “터치가 우아하고 프레이징의 뉘앙스가 무한한 연주자”라는 찬사를 보냈다.
파리를 매료시킨 김세현의 일상은 뜻밖에도 미국 보스턴에 닿아 있다. 그는 현재 보스턴 뉴잉글랜드 음악원NEC에서 석사과정을, 하버드대학교에서 영문학 과정을 동시에 밟고 있다. 프랑스를 넘어 활동 반경을 넓히고 있는 그의 존재감은 마에스트로 정명훈과의 협연 무대에서도 드러난다. 9월 데뷔 앨범 발매를 앞두고, 파리에 있는 김세현과 아르떼가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다.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연주자답게, 그의 언어와 문장에선 비유와 은유가 자주 묻어났다.
포레와 쇼팽, 파리의 풍경
김세현은 세계적인 음반 레이블 워너클래식에서 데뷔 앨범 <쇼팽, 포레>를 발매한다. 8월 24일 국내에서 선공개한 뒤 9월 4일 전 세계에 동시 발매된다. 앨범은 큰 틀에서 ‘파리’를 주제로 했다. 프랑스의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의 ‘꿈을 꾼 후에’, ‘뱃노래 제1번’ 등을 비롯해 쇼팽 ‘에튀드 작품번호 25’, 샤를 트르네의 ‘4월의 파리’(바이센베르크 편곡)가 수록된다. 파리를 중심으로 펼쳐진 다양한 음악적 풍경을 담아낸 이번 음반은 김세현의 섬세하고 낭만적인 프랑스풍의 매력을 보여줄 예정이다.
앨범은 쇼팽 ‘에튀드 작품번호 25’를 중심에 두고 포레와 샤를 트르네의 곡을 더해 완성했다. 첫 곡인 포레의 ‘꿈을 꾼 후에’는 원래 가곡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했고, 마지막은 샹송 느낌이 나는 샤를 트르네의 곡을 피아노 버전으로 편곡했다. 수미상관 구조로 완성한 셈이다.
연주자에게 거대한 도전이자 앨범의 뼈대인 쇼팽의 ‘에튀드 작품번호 25’에 대해, 김세현은 스승인 당타이선의 가르침을 되새겼다고 전했다. “선생님은 늘 쇼팽 에튀드를 ‘연습곡’처럼 치지 말고 ‘전주곡’을 치듯 상상력으로 가득 채워 연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제게 쇼팽 에튀드는 정말 시적이고 특별한 음악이에요. 특히 작품번호 25는 연주 내내 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곡들의 모음입니다.”
약 30~35분 길이의 에튀드 1~12번은 잔잔한 바람으로 시작해 거대한 대양으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는 특히 에튀드 1번 ‘에올리안 하프Aeolian Harp’를 칠 때 어린 시절 학교 축제에서 솜사탕을 먹으며 보던 핑크빛 하늘을 떠올린다고 했다. ‘꿀벌The Bees’로 불리는 에튀드 2번을 연주할 땐 작고 빠른 모기를 상상한다고. 지난해 크리스마스부터 새해까지 이어진 음반 녹음 과정에서 그는 깨달았다. 피아노를 친다는 건 결국 ‘듣는 것’이라는 것을.
9월엔 리사이틀… 정명훈과 도쿄·파리로
내년까지 그의 달력은 국내외 연주 일정으로 가득 차 있다. 이달 정명훈이 이끄는 KBS교향악단과 선보일 협연을 시작으로 바쁜 국내 일정을 소화한다. 9월엔 대구와 서울에서 데뷔 앨범 발매 기념 첫 리사이틀을 연 뒤 10월에는 파리, 11월에는 보스턴 조던홀 무대가 예정돼 있다.
19세의 피아니스트에게도 잦은 장거리 비행은 여전히 고된 일이다. 연습과 연주가 일상에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지만, 가장 편안한 시간은 보스턴 집에서 쉴 때라고. 또래들처럼 알리오올리오, 카르보나라 등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며 유튜브로 축구 영상을 본다. 클래식 외에 악뮤AKMU, 잔나비, 이문세, 김광석 등의 ‘가사가 좋은’ 이전 세대 대중음악도 즐겨 듣는다.
해외 일정이 많지만, 그가 가장 기대하는 무대는 한국에 있다. 열정적 관객을 고국에서 만나는 경험은 다른 연주와 비할 수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데뷔 앨범 발매를 기념하는 국내 리사이틀은 대구 수성아트피아(9월 5일), 서울 롯데콘서트홀(9월 6일)에서 열린다. 슈베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제18번’으로 문을 열고, 앨범 수록곡인 쇼팽의 ‘에튀드 작품번호 25’ 전곡과 ‘뱃노래 제1번’을 연주한다.
‘뱃노래Barcarolle’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쇼팽 곡 중 하나다.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곤돌라 사공들이 부르던 노래에서 유래한 이 곡은 쇼팽이 남긴 유일한 뱃노래로, 잔잔한 운하의 물결과 뱃놀이의 낭만적 분위기가 담겨 있다. “정말 그림 같은 곡이에요. 쇼팽의 곡 중 이렇게 직접적으로 운하와 뱃놀이 풍경이 떠오르는, 오감을 깨우는 음악은 없을 거예요.”
김세현은 마에스트로 정명훈과도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지난 4월 ‘정명훈 & 원 코리아 오케스트라’와 협연한 데 이어, 오는 8월 27일 정명훈, KBS교향악단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2번을 연주한다. 내년에는 정 감독 지휘의 도쿄 필하모닉(2월 18·24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3월 4·5일)과도 잇따라 무대에 오른다. 내년 3월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공연 티켓은 이미 전석 매진됐다.
“정명훈 선생님과 함께하는 무대는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어요. 지휘를 한다기보다 제 옆에 어떤 ‘에너지’가 있는 것 같아요. 선생님에게서 느껴지는 응축된 에너지는 고결하면서도 자유로운 어떤 것이에요. 그 에너지가 주변을 감싸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년 도쿄 필과 협연할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은 그가 직접 고른 곡이다. “제가 하고 싶은 곡을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택했어요. 베토벤의 5개 협주곡 중 가장 목가적이고 시적인, 특별한 곡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피아노 협주곡이기도 하죠.”
하버드대에서 영문학을 배우는 이유
김세현은 예원학교 3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해 보스턴 월넛힐 예술고등학교와 NEC 예비 학교를 졸업했다. 한국에선 피아니스트 신수정·최영미의 가르침을 받았고, 현재 NEC 석사과정에서 ‘쇼팽 스페셜리스트’ 당타이선과 NEC 피아노학과장인 백혜선을 사사하고 있다.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하버드대 영문학과 재학 중’이 눈에 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음표를 텍스트로 보면 음악과 문학은 본질적으로 유사한 장르라고 생각해요. 문학을 공부하는 작업은 피아니스트의 곡 해석에 여러모로 영감을 줍니다. 음악도 문학처럼 문장(프레이즈)이 있어요. 수많은 음표와 프레이즈에서 어디로 나아가고자 하는지가 보이죠. 문학도 수많은 단어와 문장을 쌓아 결국 말하고자 하는 게 있잖아죠. 그 과정과 방향에 공통점이 있어서 큰 도움이 되죠.”
“피아니스트 레온 플라이셔가 말했듯, 주인공은 음악이지 연주자가 아니에요The music is the star, not the performer. 연주자는 본인을 드러내기보다 작곡가와 음악을 빛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남들과 다르게 보이기 위한 연주는 인공적이에요. 자연스러운 음악을 하고 싶어요.”
그런 그가 가장 존경하는 음악가는 루마니아 출신 은둔의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다. “라두 루푸는 음악을 드높이는, 사심 없는 연주자라고 생각해요. 자아를 지우고 오직 음악 본연의 가치를 살리려 하죠. 같은 맥락에서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알프레드 코르토 같은 거장도 좋아합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결국 ‘소리’ 그 자체다. 이런 철학은 스승 당타이선의 영향이 크다. 당타이선은 음과 음 사이의 여백까지 들리게 하는 법, 피아노가 노래하듯 울리게 만드는 방법에 집중하며 그를 가르쳐왔다.
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