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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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 인근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이 세계적인 와인 산지까지 위협하면서 와인 생산자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수확을 앞둔 포도 품질뿐 아니라 와인 산업 전반의 생산과 시장 경쟁력에도 영향을 줄 수 있어서다.

31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보르도 인근에서 발생한 산불이 바람 방향에 따라 포도밭으로 번질 가능성이 남아 있어 와인 생산자들이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200년 넘게 그랑크뤼 레드 와인을 생산해온 샤토 말라르틱 라그라비에르는 산불 위험 지역에서 약 10㎞ 떨어져 있으며, 재발화하는 이른바 '좀비 산불' 가능성까지 거론되면서 긴장감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 당국은 지롱드 지역 산불의 확산세는 일단 멈췄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대피했던 주민 약 8만 명은 귀가를 시작했다. 그러나 소방당국은 127㎞에 이르는 방화선을 구축하고 진화제를 살포하는 등 잔불 진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향후 48시간이 산불 통제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수년간 프랑스 와인 산업은 기후변화에 따른 폭염과 가뭄, 생육 기간 단축, 생산량 감소, 포도 품질 변화에 이어 산불 위험까지 새로운 부담으로 떠안고 있다. 이미 지중해 연안 프로방스에서는 산불 피해가 발생했고, 루시용 지역에서는 와인 생산자 질 트루예의 9헥타르 규모 포도밭 대부분이 불에 탔다. 특히 30년 이상 재배한 카리냥 품종까지 소실되면서 그는 "대체할 수 없는 와인 유산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와인 업계가 우려하는 것은 화재로 포도나무가 직접 불에 타는 피해만이 아니다. 나무가 탈 때 발생하는 휘발성 페놀 성분이 포도 껍질을 통해 흡수되면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훈연 향이나 재 냄새가 나타나는 '스모크 테인트' 현상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국립포도·와인연구소의 에릭 세라노 연구 책임자는 초기에는 문제가 없어 보여도 발효나 숙성 과정에서 굴뚝 냄새 같은 향이 나타날 수 있다며 "시한폭탄과 같은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프랑스에서는 올여름 현재까지 약 11만5천헥타르가 산불 피해를 보았다. 이는 13만헥타르가 불타고 80명 이상이 숨진 1949년 이후 최악의 산불 시즌이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반복되는 폭염과 적은 강수량으로 산불 확산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현재 산불은 마고와 생줄리앙, 생테밀리옹 등 보르도의 대표 산지와는 다소 떨어져 있다. 그러나 페삭 레오냥과 그라브 지역은 화염과 연기에 더 가까워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산불이 북쪽이나 동쪽으로 번질 경우 더 많은 포도밭이 위험권에 들어갈 수 있으며, 관광객 예약 취소가 늘면서 지역 관광 수입 감소도 우려된다.

보르도는 2022년에도 2만헥타르 이상이 불타는 대형 산불을 경험했다. 당시 검사에서는 대부분 포도에서 연기 성분이 미미한 수준으로 나타났고 광범위한 품질 저하는 확인되지 않았다. 반면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서는 2020년 산불 이후 품질과 브랜드 훼손을 우려해 많은 와이너리가 해당 빈티지 출시를 포기했다.

프로방스의 도멘 드 라 메르카딘을 운영하는 루시 무토네는 전체 18헥타르 가운데 14헥타르가 산불 손해를 입었다고 밝혔다. 그는 수확 전까지 피해 구역과 연기 노출 포도를 검사한 뒤 오염 물질이 확인되면 수확 자체를 포기할 계획이라며 생산량이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보르도 와인 산업은 이미 구조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다. 프랑스와 해외에서 레드 와인 수요가 감소하면서 2023년 8월부터 2026년 5월까지 지롱드 지역에서는 약 2만1천헥타르의 포도밭이 정부 지원과 자발적 감축 프로그램을 통해 폐원됐다. 프리미엄 와인도 예외는 아니어서 리브엑스(Liv-ex) 보르도500 지수 기준으로 보르도 고급 와인 시장 가치는 최근 5년간 약 20% 하락했다.

기후변화는 소비 구조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더운 여름이 길어질수록 소비자들이 레드 와인보다 화이트 와인과 로제, 스파클링 와인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보르도의 주력 상품인 레드 와인 판매에도 부담이 커질 수 있다.

그러나 화이트 와인 역시 기후변화 위험에서 벗어나지 않다. 샤토 기로의 아델린 디보는 랑드 숲이 시롱강 수온을 낮게 유지해 주고, 따뜻한 가론강과의 온도 차로 가을 아침 안개가 형성되면서 귀부병균이 자라 소테른 와인의 특징적인 풍미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 산지는 이 숲 덕분에 존재한다"며 "숲이 불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매우 걱정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