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때로는 부서져서 더 아름답다
영국 런던의 비 내리는 오후는 모든 색채를 수묵화처럼 낮게 가라앉게 만든다. 그 무거운 공기 속에서 유독 아끼던 그릇 하나가 깨졌다. 어떻게든 되살리고 싶어 마트로 달려가 강력하다는 순간접착제를 사 왔다. 하지만 무심한 본드는 그릇의 상처를 순순히 받아주지 않았다. 붙여 놓으면 이내 툭 떨어지고, 억지로 버티게 하면 접착제가 흉하게 새어 나오며 각도는 곧 어긋나기 일쑤였다.

깨진 단면들이 서로를 완강히 밀어내는 그 서글픈 광경을 보며 나는 어쩌면 우리가 삶의 위기와 관계를 대하는 방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완벽함이 산산조각 나는 바로 그 균열의 순간부터 그 대상은 진정한 ‘나의 것’으로 태어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우리는 우리가 부서진 곳에서 더 강해진다”라고 썼듯, 상처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의 시작이다.

그릇을 고치기 위한 방법을 찾아 헤매다가 운명처럼 내 시선을 멈춰 세운 단어가 있었다. 바로 ‘긴쓰기’다. 긴쓰기는 깨진 도자기 파편을 옻칠로 잇고, 그 갈라진 선을 따라 황금 가루를 뿌려 마무리하는 일본의 전통 수리 기법이다. 이 기법의 정수는 수리가 ‘상처를 감추고 원래의 완벽함으로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처를 찬란하게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데 있다.

장인은 그릇이 깨졌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거나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 깨짐의 궤적을 황금빛 선으로 대담하게 강조하며, 그릇이 겪은 시련과 파괴의 시간을 하나의 훈장으로 격상시켜낸다. 수리가 끝난 그릇은 결코 예전과 같지 않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무늬를 가진 예술품으로 다시 태어난다. 상처가 곧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 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나는 아직 그 그릇을 고치지 못했다. 그릇의 파편들은 지금도 내 방 한구석, 작은 나무 상자에 담겨 있다. 날카로운 파편과 작은 조각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그 상자를 열 때마다 나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기다림’의 시간을 만난다.

언젠가 때가 돼 그 파편들이 황금빛 선으로 다시 이어질 날을 꿈꾸며 나는 그 ‘부재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간직하기로 했다. 깨진 상태로 머물러 있는 그 그릇은 완벽히 복원된 물건보다 내게 더 깊은 위로를 준다. “아직 아물지 않아도 괜찮다, 그 부서진 파편들조차 이미 너의 고유한 시간과 역사다”라고 조용히 말해주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디자인에서 가장 강력한 표현은 때로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서 나온다. 나는 이것을 ‘부재의 디자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는 순간은 그가 내 곁에 있을 때보다 그가 떠난 뒤의 빈자리가 숨 막히게 크게 느껴질 때다. ‘그가 없다’는 물리적 사실이 오히려 ‘그가 내게 누구였는가’를 가장 아프고도 선명하게 가르쳐준다. 긴쓰기가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히 황금 가루가 화려해서가 아니다. 그 찬란한 황금 아래 숨겨진 ‘깨짐’이라는 부재와 상실의 흔적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인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 삶의 결핍을 억지로 메우려고 너무 애쓰지 마라. 그 결핍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감싸안았으면 한다. 당신의 작은 나무 상자에 담긴 그 깨진 파편들을 소중히 여겼으면 한다. 그 날카로운 파편들이야말로 당신만의 독특한 ‘인사이트’가 탄생하는 발원지이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당신만의 신화가 시작되는 멋진 자리다.

“나는 나의 깨진 틈을 황금으로 이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 상처야말로 내가 세상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가장 진실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