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기업문화 지킬 수호자"
의결권도 2034년까지 증여
재단 활용해 세금 한푼도 안 내
일상적 경영 활동 관여 않지만
CEO 교체 등 중요 권한 행사
“나의 자녀가 내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아버지가 운동선수였다고 해서 자녀가 올림픽 대표팀 자리를 물려받거나 미식축구팀의 쿼터백이 되는 것만큼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전설의 반열에 오른 투자자 워런 버핏이 2006년 경제 잡지 포천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부의 세습에 대한 이 같은 의견과 거액의 기부를 통해 버핏은 오랫동안 ‘깨어 있는 투자자’로 인식됐다. 하지만 세습하지 않겠다는 대상에 벅셔해서웨이 지배권은 없었던 걸까. 벅셔해서웨이는 버핏이 지난 18일 내려놓은 회장(이사회 의장)직을 장남 하워드 버핏이 이어받는다고 20일 발표했다.
◇버핏, 남은 지분도 가족 재단에
하워드는 이사회 의장으로서 최고경영자(CEO)를 임명하는 권한을 지닌다. 벅셔해서웨이의 투자 활동과 40여 개 계열사 경영권은 그레그 에이블 CEO가 지금처럼 행사한다. 버핏은 명예회장이 됐다. 그는 주주에게 보낸 서한에서 “하워드가 (벅셔해서웨이의) 문화와 가치를 지킬 것”이라며 그를 “주주들이 보유하고 있지만 청구할 일이 없기를 바라는 보험”이라고 말했다. 에이블 CEO 역시 하워드를 벅셔해서웨이 문화와 가치의 ‘수호자’로 치켜올렸다.
버핏은 지난해 월스트리트저널(WSJ) 인터뷰에서 하워드가 회장직을 물려받는 이유에 대해 “내 아들이기 때문에 그 자리를 받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자녀 모두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며 능력보다 혈연이 회장직 승계의 핵심 이유임을 인정했다.
자신이 보유한 벅셔해서웨이 지분을 가족이 소유한 재단에 모두 승계하겠다는 뜻도 분명히 했다. “보유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겠다”고 밝힌 2006년 이후 게이츠재단에 벅셔해서웨이 B주 3억2000만 주를 넘긴 그는 지난 7월 기부를 중단했다. 그 대신 지분은 2034년 말까지 하워드 등 세 자녀 소유의 가족 재단에 모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버핏은 벅셔해서웨이 의결권의 29.7%를 보유하고 있다. 투자자와 다른 주요 주주 등이 보유한 일반적인 주식(B주) 대비 1만 배의 의결권을 갖는 A주를 통해서다. 버핏은 A주 18만8290주를 보유했고 게이츠재단에 기부한 3억2000만 주는 모두 B주다.
버핏은 “세 자녀가 각각 운영하는 재단에 대한 기부를 매년 늘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버핏의 가족은 벅셔해서웨이에 대한 지배력을 계속 행사할 수 있을 전망이다.
◇세금 한 푼 안 낸 하워드
물론 버핏의 부가 자녀에게 그대로 이전되는 것은 아니다. 하워드 등은 재단 자산을 개인적으로 처분해 사용할 수 없다. 재단 자산을 설립자, 가족 등 특수관계인이 사적으로 이용하는 행위는 미국 세법상 엄격하게 제한되기 때문이다. 다만 재단 보유 자본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결정권은 자녀에게 있다. 버핏이 재단에 기부하며 주식의 법적 소유권을 사회에 내놓는 모습을 취했지만 벅셔해서웨이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과 회장 지위는 자녀에게 남겼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삼성전자와 맞먹는 시가총액 1조900억달러(약 1515조원) 규모 기업집단의 지배권을 획득한 하워드는 한 푼의 상속·증여세도 내지 않는다. 미국 세법에서 자선 재단에 대한 기부는 상속·증여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이다.
이는 버핏과 비슷한 시기에 재산의 사회 환원을 약속한 빌 게이츠와 다르다. 게이츠는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MS) 경영에서 물러난 뒤 2020년 이사직에서도 퇴진했다. 자녀들은 MS와 관련된 자리를 맡지 않고 있다. 게이츠재단의 투자 자산을 관리하는 게이츠재단 트러스트도 MS 주식을 모두 처분해 재단과 MS 사이의 관계를 끊었다.
올해 71세인 하워드는 UC어바인 등 세 곳의 대학을 다녔지만 학사 학위는 받지 않았다. 벅셔해서웨이 본사가 있는 네브래스카주 북쪽에서 농장을 일구고 사진가와 환경운동가 등으로 활동했다. 10년 넘게 지역 보안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워드버핏재단 이사장으로 150여 개국에서 자선활동을 전개했다. 벅셔해서웨이 회장으로서 그는 후임 경영진이 회사를 쪼개려고 하거나 단기 실적주의에 매몰될 때 제동을 거는 역할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