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빅테크들이 짓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는 고성능 부품의 집합체다. 100메가와트(㎿)급 하이퍼스케일 AI 데이터센터에는 엔비디아 그래픽처리장치(GPU) 약 4만 개가 들어간다. 엔비디아 GPU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가 따라붙는다. AI 데이터센터 한 곳에는 HBM 약 33만 개가 필요하다.
그래픽=전희성 기자
그래픽=전희성 기자
GPU 로직 칩과 HBM 여러 개가 함께 올라갈 수 있도록 받쳐주는 고성능 패키징 기판인 플립칩볼그리드어레이(FC-BGA)도 약 17만 개가 사용된다. 서버와 전력 장치 주변에 촘촘히 박히는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는 약 3억3000만 개가 들어간다. 서버 랙의 막대한 열을 식히기 위한 냉각분배장치(CDU)도 약 80대가 동원된다. 이 시설은 연간 1테라와트시(TWh)에 이르는 전력이 필요하며 완전가동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이들 5대 핵심 부품을 제조하는 기업은 한국, 일본, 대만 등에 집중돼 있다.

문제는 이들 부품 공급난이 고착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AI 데이터센터 증설 열풍이 불면서 폭발하는 부품 수요를 공급 능력이 전혀 따라가지 못하면서다. 이에 따라 미국 빅테크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AI 데이터센터 증설 경쟁의 실질적 과실은 이 같은 핵심 부품을 제조하는 회사들이 거머쥐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AI 패권 핵심 변수로 떠오른 전력

공급 가뭄의 직격탄을 가장 먼저 맞은 부품은 메모리 반도체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제조하는 HBM은 없어서 못 팔 정도다. 현재 주력인 6세대 HBM4는 내년도 물량까지 완판됐다. AI 시장이 단순 학습을 넘어 실시간 연산을 요구하는 추론으로 전환되면서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도 극심한 품귀가 이어지고 있다. 반도체 제조의 필수 고부가가치 기판인 FC-BGA를 둘러싼 병목도 심각하다.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에서 웨이퍼 가공이 끝난 뒤 초미세 회로와 고성능 칩을 연결해 패키징할 때 반드시 사용되는 핵심 부품이 FC-BGA다. 삼성전기, LG이노텍이 제조하는 FC-BGA 기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가 빅테크와 서버 제조사의 생존 갈림길이 되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MLCC의 중요성도 커졌다. AI 서버는 일반 서버보다 수 배에 달하는 전력과 고주파를 견뎌야 해 전압을 안정적으로 지탱하는 MLCC가 필수적이다. 개당 단가는 낮지만 서버 한 대당 탑재량이 수억 개에 달한다.

전력 인프라 역시 AI 패권의 핵심 변수로 격상했다. 원자력, 소형모듈원전(SMR),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원부터 초고압 변압기와 전선에 이르기까지 전력 전반이 완전가동 상태다. 데이터센터 확장에 따른 전력 공급 불안이 구조적 문제로 자리 잡으면서 전력기기 슈퍼사이클은 한층 길어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엔비디아 AI 칩이 뿜어내는 막대한 열기는 기존 공랭식 팬의 한계를 넘어섰다. 이에 칩의 안정성을 담보하는 액체냉각 등 열관리 시스템이 AI 데이터센터 설계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전선으로 부상했다. 국내에선 LG전자가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대하며 입지를 넓혀가고 있다.

◇K부품사, 증설에 ‘올인’

업계 전문가들은 5대 핵심 부품의 품귀 현상이 최소 2028년까지 이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AI 시장 축이 학습에서 방대한 연산과 실시간 칩 가동을 요구하는 추론 영역으로 완전히 전환됐기 때문이다. 최재붕 성균관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수요만 급증하는 것이 아니라 AI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기본 설비 전반에서 공급 확대가 수요 증가 속도를 전혀 따라가지 못하는 구조”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부품 생태계 전체가 적기 공급을 위한 전례 없는 규모의 공장 증설 경쟁에 나섰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부품사에는 몇 년간 전례 없는 이익을 거두는 절호의 기회이자 공급망 주도권을 공고히 하는 결정적 시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채연/원종환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