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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최태원이 던진 한일 경제공동체론
최만수 도쿄 특파원
일본 언론의 최대 관심사는 SK하이닉스의 일본 반도체 공장 건설 가능성이지만, 최 회장이 줄곧 주장해온 ‘한·일 경제공동체론’에도 관심이 커지는 분위기다. 그의 주장은 단순한 경제협력론이 아니다. 한국과 일본이 느슨한 연대를 넘어 유럽연합(EU)과 같은 하나의 경제권을 구축해야 한다는 구상이다.
한·일 합치면 '6조달러 경제권'
올해 초까지만 해도 “현실성이 떨어진다”며 반신반의하던 일본 기자들의 반응도 달라졌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아사히신문 등 주요 언론에서도 한·일 경제협력의 필요성을 둘러싼 논의가 부쩍 잦아졌다.배경에는 급변한 세계 경제 질서가 있다. 미국은 동맹국에도 관세를 앞세워 자국 이익을 요구하고, 중국은 거대한 내수시장과 막대한 보조금으로 제조업 경쟁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배터리, 희토류, 에너지까지 경제와 안보의 경계도 무너졌다. 기업끼리 경쟁하는 시대를 넘어 경제권끼리 힘을 겨루는 시대가 됐다.
이런 구도에서 한국과 일본의 처지는 모호하다. 각각 놓고 보면 미국과 중국, EU에 비해 경제 규모가 작다. 하지만 둘을 합치면 약 6조달러, 세계 4위권 경제권이 된다. 액화천연가스(LNG)를 공동 구매하면 가격 협상력을 높이고, 반도체 공급망을 묶으면 경제 안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SK그룹의 사업적 이해와도 맞닿아 있다. 반도체와 AI, 에너지는 한·일 협력의 핵심 분야이자 SK의 주력 사업이다. 일본의 소재·장비 기업과 한국의 반도체 생산능력이 더 깊게 연결되고, 양국이 AI 데이터센터와 에너지 인프라를 공동 구축한다면 SK에도 새로운 시장이 열린다. 대만 TSMC 사례처럼 일본 정부의 파격적인 투자 지원을 끌어낼 여지도 있다.
경제부터 묶은 독일·프랑스
문제는 정치다. 지금 한·일 관계가 좋아도 정권이 바뀌고 과거사 문제가 다시 전면에 등장하면 어렵게 쌓은 합의가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가 양국에서 나온다. 하지만 서로 눈치만 보다가는 한·일 경제공동체는 영원히 시작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한·일보다 훨씬 치열하게 싸운 독일과 프랑스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석탄과 철강부터 공동 관리했고, 그것이 오늘날 EU의 출발점이 됐다. 서로 믿었기 때문에 경제를 묶은 게 아니라 경제를 묶으면서 신뢰를 쌓았다.한·일 경제공동체도 반도체 공급망, LNG 공동구매, 공동 투자와 장기계약처럼 실익이 분명한 분야부터 하나씩 묶어가면 된다. 양국 기업이 함께 공장을 짓고 공동 연구를 늘리며 인재가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구조를 마련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최근 미·중 정상회담은 한·일이 처한 현실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미·중이 짠 판에서 ‘룰 테이커’로 남지 않고 목소리를 키우려면 한·일 스스로 경제적 몸집을 불리고 협상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제 국익의 셈법으로 일본을 바라볼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