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E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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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도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공습을 재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양국의 합의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발표한 '에너지 휴전'은 사흘 만에 사실상 무너졌다.

15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과 가디언 등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이날 모스크바에서 남동쪽으로 약 180㎞ 떨어진 라쟌 지역의 정유시설을 공격했다.

해당 시설은 러시아 국영 석유기업 로스네프트가 소유한 곳으로 러시아 전체 정유 처리량의 약 5%를 담당한다. 수도 모스크바에도 석유제품을 공급하는 핵심 시설이다.

파벨 말코프 라쟌 주지사는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드론 공격으로 정유시설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방부는 우크라이나가 드론 69대와 장거리 '플라밍고' 순항미사일 4발을 동원했으며 이를 모두 요격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드론 잔해가 떨어지면서 불이 났다고 설명했다.

공격 규모와 피해 정도에 대한 러시아 측 주장은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정유시설 공격으로 "특별히 중요한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번 공격은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러시아 정유시설에 대한 공격 중단 조치를 끝내겠다고 밝힌 직후 이뤄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정유시설 공격을 막았던 제한은 해제됐다"며 "우리는 끝났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공격을 멈춘 동안에도 러시아가 발전소와 민간 기반 시설을 계속 공격했다는 이유에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 트루스소셜을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에너지 시설 공격을 즉시 중단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어느 쪽도 사전 합의 사실을 공개적으로 확인하지 않았다.

러시아 크렘린궁도 휴전의 범위가 정해지지 않았고 관련 작업이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가디언은 이를 백악관이 일방적으로 추진한 휴전이라고 표현했다.

우크라이나는 합의 여부와 별개로 대화 의지를 보이겠다며 사흘 동안 러시아 에너지 시설 공격을 중단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 기간에도 우크라이나 발전소와 주요 기반 시설을 겨냥한 미사일·드론 공격을 이어갔다.

러시아군은 15일 밤에도 우크라이나 중부 키로보흐라드 지역에 360대가 넘는 드론을 투입했다. 현지 당국은 기반 시설과 운송기업, 물류시설, 주택이 공격받아 3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러시아의 공격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서 우크라이나에만 정유시설 공격 중단을 압박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거래하려 하고 권위주의 지도자들에게 호감을 보인다는 직설적인 비판도 내놨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20년, 30년, 40년 동안 지도자로 있는 사람을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고 존중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한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정유시설 공격 중단을 요구한 배경에는 미국의 고유가 문제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은 중간선거를 앞두고 디젤 가격을 낮추려 하고 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이 국제 유가를 끌어올린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지 않으면 푸틴 대통령이 전쟁에 투입할 자금을 계속 확보하게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다음 거래는 언제가 되겠느냐"며 "아마 가스일 것이고, 틀림없이 가스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패트리엇 요격미사일을 추가로 제공한다면 러시아 에너지 시설 공격을 다시 중단할 수 있다는 조건도 제시했다. 러시아의 공습을 막을 방어 수단을 제공하면 정유시설 타격을 멈출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군사정보와 위성통신 문제로도 번지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탄도미사일 공격에 대한 미국의 조기경보가 중단됐고, 군사용 위성통신 스타실드와 스타링크의 속도도 제한됐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우크라이나와의 정보 공유를 중단했다는 주장을 부인했다. 스타실드 속도 제한 역시 미국 정부의 지시인지, 스페이스X의 조치인지, 기술적 장애인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남부 보로네시 지역의 군 비행장도 공격해 러시아 Su-34 전투기 여러 대를 파괴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전투기 피해 규모는 우크라이나 측 주장일 뿐 독립적으로 확인되지 않았다.

로이터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를 거부하고 공개 비판에 나서면서 양국 관계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최악의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정유시설을 둘러싼 공방이 미국과 우크라이나의 동맹 관계를 시험하는 정치적 충돌로 확대되고 있다.

이송렬 한경닷컴 기자 yisr020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