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에 휘둘린 한수원…원전해체기금 6033억 놀려 89억원 손해
국회와 시민단체의 주장에 떠밀려 현금 6000억원을 원자력발전소 해체 비용으로 마련한 한국수력원자력이 이 기금을 적절히 운용하지 않고 사실상 방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연 3% 안팎의 이자율로 회사채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해놓고 채권 이자도 보전하기 힘든 은행 정기예금에 돈을 넣어둬 결과적으로 원금을 까먹은 것이다. 공기업인 한수원이 부실한 충당금 관리로 손실을 봤다는 지적이 나온다.

◆시민단체 요구에 6033억원 현금 충당

한수원은 그동안 원전 해체 충당금을 회계상 충당부채로 적립해왔다. 충당부채는 언젠가 지출해야 할 금액을 대차대조표상 부채 항목에 미리 반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2013년 일부 새누리당 국회의원 등과 시민단체들은 “원전 해체 비용을 현금으로 쌓아두라”고 요구했다. 시민단체들은 일본 후쿠시마 사고 같은 대형 원전사고가 터질 경우 한수원의 존립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폐로 비용을 충당부채로만 쌓아두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당시 한수원은 원전 충당금을 현금으로 쌓아두는 것에 반대했다. 원전 한 기를 폐로하는 데 15년이 걸리는 만큼 충당금을 현금으로 한꺼번에 쌓아두기보다 평소에는 충당부채로 잡아놓은 뒤 필요할 때 비용으로 꺼내 쓰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민단체와 일부 의원의 주장에 못 이겨 한수원은 지난해 12월 말 원전 한 기 해체 비용인 6033억원을 현금으로 쌓아뒀다. 한수원 관계자는 “한수원 부채비율은 129%대로 200%가 넘는 미국과 프랑스 원전사보다 재무상태가 튼튼하다”며 “충당부채로 쌓아놓아도 추후 해체 비용을 감당하는 데 문제가 없지만 정치 논리에 휘말려 충당금을 현금화했다”고 말했다.

◆부실한 충당금 관리로 89억원 손해

6033억원이라는 거액을 현금으로 쌓아뒀지만 한수원은 이 돈을 사실상 방치했다. 지난해 세 차례 회사채를 발행해 차입한 금액 중 일부로 충당금을 마련했지만 한수원은 이 돈을 6개 은행 정기예금에 쌓아두기만 했다. AAA등급인 한수원 회사채의 당시 평균 발행 금리는 연 3.27%였다. 반면 6개 은행 정기예금 이자율은 평균 연 1.5%를 웃도는 수준이다. 단순계산하면 연간 약 197억원의 채권 이자를 지급하고, 은행 이자로는 약 90억원을 받는 것이다. 같은 계산으로 1~8월 한수원이 손해본 금액은 약 89억원으로 추산된다. 금융업계 관계자는 “충당금으로 한수원과 같은 신용등급의 회사채만 샀어도 손해액을 최소화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수원도 뒤늦게 이런 문제를 인식해 충당금을 운용할 자산운용 전문가를 채용하기로 했다. 공모절차를 진행 중이며 이르면 10월께 채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해체 충당금 명목으로 현금을 쌓아둔 적이 없었던 만큼 아직 기금 운용에 대한 규정조차 정하지 못했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에도 공기업 충당금 관리에 대한 지침은 없다.

한수원 관계자는 “자산운용 전문가를 채용하면 관련 운용 규정을 정비한 뒤 외부 자산운용사를 선정해 자금을 적절하게 관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 원전 해체 충당금

원자력 발전소 해체를 위해 적립해놓은 자금. 한국수력원자력은 전기요금에 포함돼 있는 원전 사후처리비용 중 일부(㎾h당 약 2.08원)를 적립한다. 그동안 회계상 충당부채로 적립했지만 지난해 말 시민단체와 국회의 요구로 원전 1기 해체 비용인 6033억원을 현금으로 마련했다.

심성미/하헌형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