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지난 12일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기존 방침을 바꿀 의사가 없다고 밝히면서 일본발(發) 수출규제 피해가 국내 산업 전반으로 확산되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 소재에 이어 반도체 장비와 탄소섬유, 공작기계, 정밀화학제품 등이 다음 ‘타깃’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日, 내달 화이트리스트서 한국 제외 거듭 밝혀…"다음 타깃은 정밀화학·공작기계·반도체 장비"
화이트리스트는 전략물자 수출 우대국을 말한다. 대량살상무기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전략물자에 대해선 수입국이 ‘수입할 때마다 일일이 허가를 받는 것’(개별허가)이 원칙이지만 대다수 국가는 믿을 만한 우방국에 대해선 화이트리스트로 지정해 3년에 한 번만 허가(포괄허가)를 받도록 편의를 봐준다. 한국이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지면 1100개에 이르는 전체 전략물자 수입이 한층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류세희 전략물자관리원 제재분석실장은 14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전화통화에서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된다고 1100개 품목이 개별허가로 자동 전환되는 건 아니다”고 설명했다. 전략물자관리원은 전략물자 수출입관리 업무를 담당하는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전략물자관리원에 따르면 포괄허가에는 화이트리스트 국가용 ‘일반 포괄허가’와 모든 국가 수출에 적용되는 ‘특별일반 포괄허가’가 있다. 화이트리스트에서 빠져 일반 포괄허가를 적용받지 못하더라도 특별일반포괄허가는 여전히 적용받을 수 있다는 얘기다.

류 실장은 “전략물자 수출을 일괄 규제하면 일본 수출기업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1100개 품목 중 한국이 타격받을 만한 품목을 하나씩 개별허가로 바꿔 압박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류 실장은 일본이 다음 타깃으로 선정할 가능성이 높은 품목으로 △반도체·디스플레이 장비 △탄소섬유 △공작기계 △기능성 필름·접착제·도료 등 정밀화학제품을 꼽았다. 류 실장은 “이들 분야는 일본 제품의 시장 점유율과 한국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게 특징”이라며 “컴퓨터수치제어(CNC) 공작기계 컨트롤러는 일본 기업 화낙이 독일 지멘스와 함께 세계 공급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전했다. CNC 공작기계는 자동차, 조선, 전자 등 산업 전반에 쓰인다. 평판 디스플레이 제조 장비의 경우 일본 수입 의존도가 70%를 넘는다. 일본산 장비가 제때 공급되지 않으면 디스플레이 생산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개별허가로 전환된 품목은 제3국을 통한 우회 수입도 규제 대상이라고 류 실장은 설명했다. 그는 “일본에서 제3국으로 수출한 물품을 한국 업체가 들여오는 것도 일본의 심사 대상”이라며 “일본이 전략물자 수출통제에 나섰다는 건 일본 기업이 생산한 제품이 최종 사용자에게 갈 때까지 이르는 모든 유통 과정을 들여다보겠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다만 일본 기업의 해외 생산기지로부터 수입하는 건 규제 대상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이 정부의 정책 기조에 순응하는 일본의 관행상 이런 방식의 물품 조달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류 실장은 “전략물자 통제는 리스트에 있는 물품뿐 아니라 이를 생산, 개발하는 데 필요한 기술도 규제 대상”이라며 “일본 업체로부터 개별허가 대상 품목의 기술을 도입하는 것도 규제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