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부심·조직력·1등주의' 실종…삼성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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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이 흔들린다
(1) 사라진 자부심·조직력·1등주의
日보복 겹쳐 초유의 복합위기
(1) 사라진 자부심·조직력·1등주의
日보복 겹쳐 초유의 복합위기
“박 프로님,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겁니까. 너무 변화가 없는 것 같아요.”(삼성 4년차 직원) “글쎄 말이야. 다들 걱정은 하면서도 팔짱만 끼고 있네.”(7년차 직원)
국내 대표 기업 삼성이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다. 검찰 수사, 한·일 갈등 여파, 반도체 불황, 주력 제품 시장점유율 하락 등과 같은 외부 요인뿐만 아니라 혁신 부재, 목표의식 약화, 비전 실종 등의 내부적 위기가 가세하면서다. 강한 조직력과 자부심, 1등정신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호령하던 예전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4월 삼성전자는 접히는 스마트폰 갤럭시폴드 출시를 전격 연기했다. 화면 결함이 문제였다. 삼성전자는 “수주 안에 출시 일정을 재공지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석 달째 감감무소식이다. 일이 터지면 임직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해결하던 특유의 ‘삼성 DNA’는 온데간데없다. 전직 사장 A씨는 “예전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삼성의 ‘전매특허’인 빠른 의사결정과 조직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혀를 찼다.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 ‘칼퇴근’을 즐기는 젊은 직원들도 마음 한쪽으로는 회사와 조직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기강 해이와 함께 계열사·사업부별 유기적 협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 컨트롤타워 없이 계열사별 독립경영과 사업부별 실적 관리 시스템이 자리잡으면서다. “연말 인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 자기 것만 챙긴다”(임원 B씨)는 탄식도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안팎의 위기를 타개하고 거대 조직의 방향을 틀기에는 힘겨워보인다는 지적이다.
2년 이상 끌고 있는 삼성 수사와 재판도 큰 걸림돌이다.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와 잦은 압수수색, 임직원의 무더기 구속으로 ‘현장 조직력’이 느슨해지고 삼성맨이란 ‘자부심’은 땅에 떨어졌다는 진단이다. 한 원로 기업인은 “최근 삼성은 ‘24시간’을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쓰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1등은커녕 그저 그런 기업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임질 일은 서로 미뤄"…먼지털기식 수사에 무너진 '조직의 삼성'
“50년 된 회사와 5년 된 회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축적된 데이터의 양이다. 생생한 데이터, 사례 연구, 역사 같은 것은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귀중한 것들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7년 발간한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삼성에서는 기록이 사라지고 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한 게 아니라면 웬만해선 보고서도 작성하지 않는다. 꼭 필요하면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키워드를 적어 보고에 들어간다. 그마저도 보고가 끝나면 파쇄한다. 일반적인 경영 관행, 사업 검토를 위한 보고서도 압수수색 과정에서 별건수사의 ‘아이템’이 될 수 있어서다. 옆자리 동료가 어느 날 ‘내부고발자’로 변해 자신을 저격할지 모른다는 상호 불신도 커지고 있다. 지난 1년간 검찰의 압수수색을 100회 가까이 당하면서 생긴 변화다.
자부심 사라진 ‘삼성맨’
글로벌 일류 기업을 외치던 삼성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품의 위기뿐만 아니다. ‘적폐 기업’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삼성이 ‘1등 기업’이 되기 위해 쌓아온 경영 철학들마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50만 명의 삼성그룹 조직원이 느끼던 ‘삼성맨’으로서의 자부심,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강한 조직력, 1등 정신이 사라지면서 ‘3무(無) 조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차적인 이유는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사정기관의 전방위 수사다.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에 이어 다스 소송비 지원, 노동조합 와해 사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분식회계 증거인멸 혐의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사가 이어졌다. 이 가운데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건 아직 없다. 하지만 임직원이 줄줄이 구속 기소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조직 체계와 기업 문화는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특히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대리급 직원’까지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된 뒤 조직의 동요가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삼성 조직원 누구나 ‘잠재적 범법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이사는 두 차례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가 기각됐다. 이 회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스무 번 넘게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았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일상적인 업무와 경영 활동도 ‘증거인멸’ ‘횡령’ 등의 의혹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임직원이 ‘책임질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목표는 ‘리스크 최소화’
자연스레 조직 운영은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삼성이 ‘로펌 공화국’이 됐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국정농단 사건은 법무법인 태평양,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은 김앤장, 공정거래법과 관련해선 광장, 노조 와해 의혹은 화우·세종 등이 맡고 있다. 삼성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혔던 ‘빠르고 공격적인 의사결정’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삼성 타도’를 외치는 상황에서 의사결정 반경은 더욱 좁아졌다. 삼성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소비자 인식조사에서 비호감 지수가 LG그룹보다 10%포인트 이상 높게 나온 걸 봤다”며 “신제품과 신사업을 검토할 때도 중소기업의 사업 영역을 침해한다는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의사결정을 미룰 때가 많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DS(반도체·부품)부문은 올초 내부적으로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회사가 되자’는 경영 목표까지 세웠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세세한 지침을 내놔 젊은 직원들의 공감을 별로 얻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 DS부문의 한 직원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은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내부통제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평소 주변에 “임직원에게 인정받는 경영인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7·4제(7시 출근, 4시 퇴근) 시행’처럼 조직 혁신을 이끌 만한 이 부회장의 ‘극약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공식적으로 전면에 나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뒤 ‘원(one) 삼성’ 개념이 사라지면서 삼성의 조직력도 약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국정농단과 관련한 대법원 판결을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경영 철학과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재연/황정수/좌동욱 기자 yeon@hankyung.com
국내 대표 기업 삼성이 극심한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다. 검찰 수사, 한·일 갈등 여파, 반도체 불황, 주력 제품 시장점유율 하락 등과 같은 외부 요인뿐만 아니라 혁신 부재, 목표의식 약화, 비전 실종 등의 내부적 위기가 가세하면서다. 강한 조직력과 자부심, 1등정신을 앞세워 글로벌 시장을 호령하던 예전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지난 4월 삼성전자는 접히는 스마트폰 갤럭시폴드 출시를 전격 연기했다. 화면 결함이 문제였다. 삼성전자는 “수주 안에 출시 일정을 재공지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석 달째 감감무소식이다. 일이 터지면 임직원들이 밤을 새워가며 해결하던 특유의 ‘삼성 DNA’는 온데간데없다. 전직 사장 A씨는 “예전 같았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삼성의 ‘전매특허’인 빠른 의사결정과 조직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혀를 찼다.
주 52시간제 시행으로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과 ‘칼퇴근’을 즐기는 젊은 직원들도 마음 한쪽으로는 회사와 조직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기강 해이와 함께 계열사·사업부별 유기적 협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 컨트롤타워 없이 계열사별 독립경영과 사업부별 실적 관리 시스템이 자리잡으면서다. “연말 인사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두 자기 것만 챙긴다”(임원 B씨)는 탄식도 나온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안팎의 위기를 타개하고 거대 조직의 방향을 틀기에는 힘겨워보인다는 지적이다.
2년 이상 끌고 있는 삼성 수사와 재판도 큰 걸림돌이다.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와 잦은 압수수색, 임직원의 무더기 구속으로 ‘현장 조직력’이 느슨해지고 삼성맨이란 ‘자부심’은 땅에 떨어졌다는 진단이다. 한 원로 기업인은 “최근 삼성은 ‘24시간’을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쓰고 있다”며 “이대로 가면 1등은커녕 그저 그런 기업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책임질 일은 서로 미뤄"…먼지털기식 수사에 무너진 '조직의 삼성'
“50년 된 회사와 5년 된 회사의 결정적인 차이는 축적된 데이터의 양이다. 생생한 데이터, 사례 연구, 역사 같은 것은 돈을 주고도 못 사는 귀중한 것들이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7년 발간한 《이건희 에세이: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 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삼성에서는 기록이 사라지고 있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위한 게 아니라면 웬만해선 보고서도 작성하지 않는다. 꼭 필요하면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키워드를 적어 보고에 들어간다. 그마저도 보고가 끝나면 파쇄한다. 일반적인 경영 관행, 사업 검토를 위한 보고서도 압수수색 과정에서 별건수사의 ‘아이템’이 될 수 있어서다. 옆자리 동료가 어느 날 ‘내부고발자’로 변해 자신을 저격할지 모른다는 상호 불신도 커지고 있다. 지난 1년간 검찰의 압수수색을 100회 가까이 당하면서 생긴 변화다.
자부심 사라진 ‘삼성맨’
글로벌 일류 기업을 외치던 삼성이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품의 위기뿐만 아니다. ‘적폐 기업’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삼성이 ‘1등 기업’이 되기 위해 쌓아온 경영 철학들마저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50만 명의 삼성그룹 조직원이 느끼던 ‘삼성맨’으로서의 자부심,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한 강한 조직력, 1등 정신이 사라지면서 ‘3무(無) 조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1차적인 이유는 수년째 이어지고 있는 사정기관의 전방위 수사다. 2016년 10월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에 이어 다스 소송비 지원, 노동조합 와해 사건,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 분식회계 증거인멸 혐의까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수사가 이어졌다. 이 가운데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받은 건 아직 없다. 하지만 임직원이 줄줄이 구속 기소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조직 체계와 기업 문화는 서서히 와해되고 있다. 특히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대리급 직원’까지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된 뒤 조직의 동요가 상당했다는 후문이다. 삼성 조직원 누구나 ‘잠재적 범법자’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삼성바이오로직스 대표이사는 두 차례나 구속영장이 청구됐다가 기각됐다. 이 회사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스무 번 넘게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았다. 삼성 고위 관계자는 “일상적인 업무와 경영 활동도 ‘증거인멸’ ‘횡령’ 등의 의혹을 받는 것을 보면서 임직원이 ‘책임질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으려 한다”고 설명했다.
목표는 ‘리스크 최소화’
자연스레 조직 운영은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삼성이 ‘로펌 공화국’이 됐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국정농단 사건은 법무법인 태평양,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의혹은 김앤장, 공정거래법과 관련해선 광장, 노조 와해 의혹은 화우·세종 등이 맡고 있다. 삼성의 가장 큰 강점으로 꼽혔던 ‘빠르고 공격적인 의사결정’은 뒷전으로 밀릴 수밖에 없다.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삼성 타도’를 외치는 상황에서 의사결정 반경은 더욱 좁아졌다. 삼성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소비자 인식조사에서 비호감 지수가 LG그룹보다 10%포인트 이상 높게 나온 걸 봤다”며 “신제품과 신사업을 검토할 때도 중소기업의 사업 영역을 침해한다는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의사결정을 미룰 때가 많다”고 전했다.
삼성전자 DS(반도체·부품)부문은 올초 내부적으로 ‘사회로부터 사랑받는 회사가 되자’는 경영 목표까지 세웠다. 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세세한 지침을 내놔 젊은 직원들의 공감을 별로 얻지 못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자 DS부문의 한 직원은 “사회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일은 원천봉쇄해야 한다는 이유에서 내부통제가 과도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평소 주변에 “임직원에게 인정받는 경영인이 되고 싶다”는 얘기를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선언’ ‘7·4제(7시 출근, 4시 퇴근) 시행’처럼 조직 혁신을 이끌 만한 이 부회장의 ‘극약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하지만 이 부회장이 공식적으로 전면에 나서 비전과 전략을 제시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미래전략실이 해체된 뒤 ‘원(one) 삼성’ 개념이 사라지면서 삼성의 조직력도 약해졌다. 재계 관계자는 “국정농단과 관련한 대법원 판결을 앞둔 시점에서 자신의 경영 철학과 목표를 제시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재연/황정수/좌동욱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