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건강보험료율 및 주택 공시가격 인상으로 은퇴자들 사이에서 “건보료 부담이 늘었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 모습.  /한경DB
정부의 건강보험료율 및 주택 공시가격 인상으로 은퇴자들 사이에서 “건보료 부담이 늘었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사 모습. /한경DB
중견기업을 다니다가 올초 은퇴한 A씨는 건강보험료 고지서를 보고 깜짝 놀랐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소득이 확 줄었는데 다달이 내는 건보료(장기요양보험료 포함)는 43만8100원에서 85만900원으로 두 배 가까이로 늘었기 때문이다. A씨는 퇴직 후 임대사업을 시작해 연금과 기존에 있던 금융소득을 합쳐 연 1억1800만원의 소득이 있다. 은퇴 전 연소득 1억8000만원(금융소득 3000만원 포함)보다 6000만원 이상 줄었다. A씨는 이상해서 건강보험공단에 문의했지만 “은퇴 후 지역가입자가 되면 직장인 때와 달리 재산에도 건보료를 매기고, 금융·임대소득 등 기타 소득에 대한 공제 혜택이 없어져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건강보험에 대한 은퇴자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지역가입자에게만 재산 보험료를 부과하는 불합리한 제도가 고쳐지지 않는 가운데 주택 공시가격과 건보료율이 줄줄이 오르면서 보험료 부담이 급격히 커졌기 때문이다. 지난해 7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 때 재산 보험료 축소 등 일부 개선이 이뤄졌지만 저소득층만 혜택을 봤다. 정부는 중산층 이상 지역가입자는 오히려 부담을 더 늘렸다. 여기에 지난해 주택 공시가격의 큰 폭 상승, 올해 건보료율 8년 만의 최고폭 인상(3.49%) 등이 겹치면서 보험료가 치솟은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은퇴자의 건보료 부담은 앞으로 더 무거워질 전망이다. 정부가 올해도 주택 공시가격을 크게 올린 데다 내년 건보료율도 올해만큼 많이 올리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년엔 2000만원 이하 임대소득·금융소득에 대한 건보료 부과도 예정돼 있다.

지난해 기준 60세 이상 지역가입자는 331만 명이다. 베이비부머의 은퇴가 본격화하면 지역가입자는 급증할 것으로 보인다. 이종복 퇴직자총연합회 사무총장은 “왜곡된 건보료 체계를 방치하면 은퇴자의 불만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건강보험의 지속 가능성에도 타격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만 재산에 건보료 매겨…"소득은 연금뿐인데 20% 내라니"

“공무원이 퇴직하면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는데 재산과 자동차에도 건강보험료를 물린다. 공무원 재직 때보다 소득이 줄었는데 건보료를 더 내는 게 어떻게 결과가 정의로운 나라인가.”

최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이다. 건강보험 제도에 대한 은퇴자의 불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건강보험공단에도 보험료 민원이 매년 약 7000만 건 접수되는데 대부분 지역가입자 차별 철폐를 호소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정부는 불합리한 제도는 그대로 둔 채 주택 공시가격과 건보료율만 대폭 올려 은퇴자의 부담을 더 키우고 있다. 이 때문에 ‘은퇴 후 각종 정부 정책이 겹쳐 건보료가 두 배 넘게 뛰었다’ ‘100만원 넘는 건보료 폭탄을 맞았다’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했지만…

한국 건보료 부과체계는 직장가입자는 소득에만 건보료를 매긴다. 반면 은퇴자, 자영업자 등 지역가입자는 소득뿐 아니라 재산에도 건보료를 물린다. 은퇴 후 월소득이 국민연금 130만원밖에 없는 이모씨는 서울 서초구에 공시가격 16억원짜리 아파트가 있다는 이유로 지역보험료로 월 27만4600원을 낸다. 소득의 20% 이상이 건보료로 나가는 셈이다.

세계에서 재산에 건보료를 물리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일본도 중앙정부 차원이 아니라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만 운영하고 있어 사실상 한국이 유일하다. 건보공단 관계자는 “과거에는 자영업자 소득 파악이 어려워 재산보험료가 불가피했지만 이제는 소득파악률이 80%를 넘기 때문에 건보료 부과 기준을 소득 중심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런 점을 감안해 작년 7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을 단행했지만 은퇴자들의 불만은 여전하다. 재산 5000만원 이하, 배기량 1600㏄ 이하 자동차 보유자 등 저소득층엔 혜택을 줬지만 중산층 이상은 오히려 부담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연금소득을 건보료에 반영하는 비율을 20%에서 30%로 높인 데다 건보료를 매기는 소득·재산 등급표상 연소득 3860만원, 재산 과세표준 5억9700만원 이상인 지역가입자는 보험료를 더 내게 했다.

다른 차별도 개선하는 시늉만 냈다. 직장가입자의 기타 소득 문제가 대표적이다. 직장가입자의 월급 외 금융·임대소득 등은 건보료 계산 때 7200만원을 공제해주는 것이 특혜라는 지적이 많았는데 이 기준을 3400만원으로 낮추는 데 그쳤다. 바뀐 기준으로도 금융소득 1억원에 대해 직장인은 월 건보료 39만원을 내지만 은퇴자는 60만원을 납부해야 한다. 이종복 한국퇴직자총연합회 사무총장은 “지역가입자만 재산보험료를 내는 것도 억울한데 직장가입자는 소득보험료도 제대로 안 걷으니 이게 정상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공시가격, 보험료율까지 큰 폭 인상

설상가상으로 주택 공시가격발(發) 건보료 상승도 현실이 되고 있다. 주택 공시가격은 지역가입자의 건보료를 매기는 기준이 된다. 서울 공동주택 공시가격 상승률은 2017년 8.1%에서 작년 10.2%로 뛰었다. 공시가격 상승은 지역가입자의 경우 작년 11월 건보료에 반영됐다. 그 결과 가구당 평균 보험료가 9.4% 증가했다. 전년도 증가율(5.4%)의 두 배에 육박한다. 공시가격 상승 영향이 컸다는 분석이다.

올 1월엔 건강보험료율도 3.49% 올랐다. 2011년(5.90%) 이후 가장 큰 인상폭이다. 정부가 건강보험 보장성 강화 대책, 이른바 ‘문재인 케어’로 건보 지출이 늘어나자 재정건전성을 위해 건보료 3%대 인상을 추진한 탓이다. 공무원연금 월 320만원에 임대·금융소득 6000만원(필요경비 제외)이 있고 아파트 한 채(공시가격 19억7600만원)를 보유한 퇴직자 김모씨는 건보료 부과체계 개편, 주택공시가격 상승, 건보료율 인상을 거치면서 건보료가 월 48만5600원에서 66만3800원으로 36.7% 올랐다.

김용하 순천향대 IT금융경영학과 교수는 “현 건강보험 제도는 형평성이 현저히 떨어지고 특히 은퇴자에게 가혹하다”며 “소득파악률이 개선된 만큼 소득 중심 건보료 부과체계 개혁을 미룰 이유가 없다”고 지적했다.

서민준 기자 morand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