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5년 앞둔 직장인 A씨(50)는 요즘 근심이 많다. 퇴직연금 개인연금만 믿고 특별한 노후 대책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은퇴 후 국민연금을 수령하는 65세까지 받는 연금은 월 90만원뿐이다. 2억원가량의 정기예금에서 나오는 이자는 월 10만원대에 불과하다. A씨는 “금리가 크게 떨어지면서 은퇴 후 생활비에 대한 불안이 커졌다”며 “노후자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원금을 까먹는 건 더 두려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은퇴를 앞둔 5060세대가 진퇴양난에 처했다. 은행에 넣어두자니 이자가 쥐꼬리고, 투자에 나서자니 파생결합펀드(DLF)와 라임펀드 사태처럼 대규모 원금 손실을 볼까 봐 두렵다.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달 초부터 은행들은 줄지어 예·적금 금리를 0.2~0.3%포인트 인하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연 0.5%로 내린 데 따른 후속 조치다. 1년짜리 만기 예금은 각종 우대금리를 받아도 이자가 연 0.8% 안팎에 불과하다. 2000년대 초 예금 금리가 최고 연 8%가량이었음을 고려하면 같은 이자를 받기 위해 그때보다 10배 가까이 더 많은 자산을 갖고 있어야 하는 셈이다.

여기에 국민연금 수령 시기가 단계적으로 늦춰지면서 ‘소득 크레바스’(연금 개시 전까지 소득 없이 지내는 기간)는 평균 12.5년까지 늘어났다. 초저금리가 고착화하면서 ‘은퇴양난’의 딜레마가 사회 문제로 대두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8억 맡겼는데 月 이자 50만원…예·적금만 믿기엔 노후가 막막
묻어둬도 돈 안되고


하나금융 100세 행복연구센터가 최근 발표한 ‘대한민국 퇴직자들이 사는 법’이라는 보고서에 따르면 퇴직자들은 취미를 즐기고, 매년 한두 번 해외여행을 하는 등 ‘여유 있는 삶’을 위해서는 은퇴 후 월 400만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이런 생활을 누리는 금(金)퇴족은 전체의 8%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유’는 고사하고 실제 지출하는 생활비(가구당 월 252만원)조차 마련하기 빠듯한 퇴직자가 수두룩하다. 50대 이상 퇴직자의 60% 이상이 자영업, 재취업 등을 통해 모자란 생활비를 벌고 있다.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퇴직자가 또 다른 경쟁에 내몰리고 있다.” 하나금융 보고서의 결론이다.

퇴직은 빠르고 국민연금은 늦게 준다

1000명의 퇴직자가 직장에서 물러난 시기는 평균 49.5세에 불과한 것으로 집계됐다. 근로기준법상 보장된 정년 60세를 못 채우고 밀려나는 퇴직자가 많다는 의미다. 퇴직연령이 당겨졌지만 모자란 생활비를 채워줄 국민연금 수령 시기는 점차 늦춰지고 있다. 정부는 2013년 국민연금의 고갈을 막기 위해 첫 수령 시점을 60세에서 65세로 단계적으로 늦추는 안을 마련했다. 주요 직장 퇴직 후 국민연금 수령까지 남은 ‘소득 크레바스’ 기간은 평균 12.5년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과거처럼 은행에 평생 모은 재산을 넣어두고 이자로 생활하며 노후를 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980년 평균 연 18.6%였던 주요 은행 정기예금 금리는 1990년 10%, 2000년 7%, 2010년 3.2%로 떨어졌다. 최근 기준금리가 연 0.5%로 떨어지면서 시중은행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연 0.8%로 낮아졌다. 세금을 제한 뒤 월 50만원의 ‘쌈짓돈’을 마련하려면 약 8억2000만원의 은행예금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쥐꼬리 수익률’을 보이는 퇴직연금, 연금저축으로도 모자란 소득을 채우기란 쉽지 않다. 은퇴 후 30년간 월 400만원을 연금으로 받기 위해선 약 11억원(국내 퇴직연금의 최근 5년 평균 연 수익률 1.88%로 가정)을 쌓아둬야 한다. ‘전문직이 아닌 이상 여유 있는 노후는 없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은퇴 후에도 10년 이상 더 일해야

주요 직장에서 퇴직한 이들은 또 다른 경쟁에 내몰린다. 한국의 실질 은퇴연령은 70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64세)보다 6년 더 길다. 실질 은퇴연령이란 공적연금 수급연령이 시작된 뒤에도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이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시점을 의미한다. 노후 준비가 덜 된 채 50세 언저리에서 은퇴한 이들은 창업하거나 아르바이트, 일용직을 통해 20년가량 더 돈을 벌고 있다는 의미다. 비교적 안정적인 대기업에서 퇴직한 사람들도 각종 자격증을 취득해 취업시장에 뛰어든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 1월 기준 65세 이상 고용률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8%포인트 오른 29.1%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퇴직=은퇴’라는 등식이 무너진 만큼 적극적으로 근로소득을 올리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자율이 낮더라도 최대한의 연금을 확보하려는 노력도 필수다. 김혜령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공적연금 수급연령이 늦춰지고, 최종 은퇴연령은 뒤로 미뤄지는 게 세계적 추세”라며 “노후를 준비하려면 청년기에 퇴직연금, 연금저축 등에 가입한 뒤 최대한 깨지 말고, 적극적으로 인생 이모작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펀드에 넣었더니 원금 까먹고…임대로 생활비 벌려다 '稅폭탄'
투자자는 손실 무서워


유례없는 ‘제로 금리’는 은퇴 전후의 5060세대를 고위험 투자의 유혹으로 몰아넣고 있다. 잇단 대규모 펀드 손실 사태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으로 예·적금만으로 노후자금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처럼 부동산 시장에 의존하기도 어렵다. 임대소득을 노리다가 ‘과세폭탄’만 맞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졌다. 일부는 고금리로 유혹하는 유사 수신 사기에 휘말리는 등 부작용도 늘고 있다.

고금리 상품에 흔들리는 5060

11일 금융권에 따르면 예·적금 외의 고수익·고위험 상품에 투자했다가 피해를 본 투자자의 상당수는 5060세대다. 지난해 우리·하나은행의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펀드(DLF) 개인 피해자(1476명) 중 만 50세 이상~70세 미만이 전체의 53%(784명)를 차지했다. 은행권 관계자는 “라임 펀드, 디스커버리 펀드 등 최근 문제가 된 펀드에 가입한 피해자 상당수가 금융 자산이 어느 정도 있으면서 중금리 이상을 원한 이들”이라며 “은행으로서도 은퇴자금에 관심이 많은 5060세대를 상대로 마케팅하기가 쉬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은행을 통한 투자는 그나마 낫다. 유사 수신업체나 투자자문업체의 고금리 유혹에 빠졌다가 피해를 구제받지 못하는 사례도 많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P2P(개인 간 거래), 가상화폐 등 5060세대에게 생소한 단어를 써가며 신종 투자인 듯 꼬드기는 게 전형적인 수법이다. 50대 직장인 A씨는 최근 한 소규모 투자업체에 1억원을 맡겼다가 원금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AI를 활용한 투자로 매달 10% 이자를 지급한다고 해 귀가 솔깃했다. 알고 보니 새로운 투자자를 모집해 상위 투자자에게 ‘돌려막기’식으로 돈을 지급하는 다단계 사기였다. A씨는 “노후 자금을 마련해 보려고 가족 몰래 넣은 것인데 눈앞이 깜깜하다”고 털어놨다.

임대수익 받으려니 ‘사방이 규제’

대폭 강화된 부동산 규제도 은퇴세대가 방황하는 이유 중 하나다. 부동산 담보 대출이 깐깐해졌을 뿐 아니라 임대사업자에게 주는 비과세혜택도 줄었다. 지난 1일부터는 연간 임대소득 2000만원 이하에 대해서도 전면과세가 시행됐다. 임대사업자에 대한 전수 조사도 예고돼 있다. 정부는 임대사업자가 의무를 위반한 경우 과태료를 부과하고 세제혜택도 환수하기로 했다. 안명숙 우리은행 부동산투자지원센터 부장은 “비과세혜택이 폐지된 데다 자칫 조사에 걸리면 과세폭탄을 맞을 수 있다”며 “은퇴 후 임대소득만을 노리고 부동산에 투자하기엔 심리적 장애물이 너무 커진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추진 중인 ‘전월세 신고제’도 변수가 될 전망이다. 그동안은 업무용 오피스텔을 분양받아 주거용으로 월세를 놓고 생활비를 받는 사례가 많았다. 업무용으로 임대를 한 것처럼 꾸미면 부가세를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 앞으로는 어려워질 전망이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정년 이후 일용, 단기직 중심의 일거리를 다시 찾아나서는 중년층이 늘어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나금융연구소가 은퇴 후 퇴직자 1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은퇴 이후 생활비는 여전히 본인(38.4%) 또는 배우자의 경제활동(36.2%)에 의존하는 사례가 많았다. 모아 놓은 금융상품으로 생활비를 충당한다는 비중은 16.8%에 그쳤다.

정소람/김대훈/송영찬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