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묶음할인' 세계 최초로 금지한 환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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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포장금지법 시행
마트·슈퍼·식품업계 '쇼크'
1000원짜리 라면 '5개 묶음'
100원도 할인 못해
유례없는 '마케팅 규제'
기업·소비자 모두 피해
마트·슈퍼·식품업계 '쇼크'
1000원짜리 라면 '5개 묶음'
100원도 할인 못해
유례없는 '마케팅 규제'
기업·소비자 모두 피해
햇반 1개 가격은 1600원이다. 6개짜리 묶음 상품은 7280원에 팔린다. 묶음 상품의 개당 가격이 낱개 상품보다 25% 정도 싸다. 다음달 1일부터 대형마트와 슈퍼마켓 등에서 이런 묶음 할인상품이 사라질 전망이다. 재포장 할인 판매를 금지하는 속칭 ‘재포장금지법’이 시행되기 때문이다.
환경부는 지난 18일 유통과 식품업계 등에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의 하위 법령인 ‘제품의 포장재질·포장방법에 관한 기준 등에 관한 규칙’ 개정안(재포장금지법)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환경부가 지난 1월 28일 개정·공포한 재포장금지법의 구체적인 시행 방안이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다음달부터 묶음 판매는 가능하지만 묶음 ‘할인 판매’는 금지된다. 2000원짜리 제품 2개를 묶어 4000원에 판매하는 것은 합법이지만, 2000원짜리 2개를 묶어 3900원에 판매하는 건 위법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상품을 한 박스에 모아 파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롯데제과가 자사 과자 제품 10개를 모아 한 박스에 넣어 파는 ‘과자 종합선물세트’도 팔 수 없게 된다.
환경부 측은 “식품업계에서 묶음 할인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이를 묶을 때 사용하는 접착제와 플라스틱 또는 포장박스가 과도하게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와 학계는 수십 년간 이어온 마케팅과 가격경쟁 체제를 무너뜨려 결국 소비자 편익을 떨어뜨리는 규제라고 해석하고 있다. 환경 유해성에 관한 근거나 영향평가 없이 과도하게 시장가격에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많이 샀을 때 깎아주는 건 소비자 후생이고, 가격 인센티브를 통해 소비를 증대하는 정상적인 경제 행위”라며 “선진국 기업들도 흔히 쓰는 묶음 할인 판매를 포장으로 규제하는 것은 세계 최초”라고 지적했다.
유통업체 간 역차별 문제도 있다. 환경부는 트레이더스 등 대규모로 판매하는 창고형 할인마트에는 묶음 할인 판매를 허용해줬다. 온라인쇼핑 업체에 대해서도 판단을 보류했다. 과대 포장으로 많은 문제가 제기됐던 쿠팡, 마켓컬리, 쓱닷컴 등 온라인 유통업체의 재포장과 관련해선 아직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햇반·라면 묶음' 싸게 팔면 불법…과자·맥주값도 줄줄이 오를 판
'하나 덤' 사은품도 금지…과도한 시장가격 개입 논란
환경부의 ‘재포장금지법’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환경보호 명분으로 묶음 할인 판매라는 고전적인 마케팅 활동을 금지시키는 무리수라는 비판이 터져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무리하게 규제 위주로 환경 정책을 펼 게 아니라 인센티브 위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식품·유통·포장업계를 혼란에 빠뜨린 환경부가 시장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수렴할지 주목되고 있다. 소비자-기업 ‘윈윈’하던 규모의 경제
자동차 한 대를 제조할 때 비용이 1000만원이라면 두 대를 생산할 때 비용은 2000만원이 아니다. 재료비와 전력, 인건비는 더 들지만 공장 생산시설 등 비용은 그대로기 때문이다. 두 대를 제조할 때는 2000만원보다 훨씬 덜 든다. 많이 만들어 많이 팔수록 하나를 더 제조할 때 드는 ‘평균비용(average cost)’이 줄어든다는 경제학의 원리다. 팔 때도 마찬가지다. 많이 만들어 많이 팔 때, 어느 선까지 할인해야 최대 이익이 날지를 기업들은 늘 계산한다. 기업은 그렇게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왔다.
식품·화장품 등 소비재업계는 이 원리를 수십 년간 가장 많이 적용해온 분야다. 묶음 할인 판매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마케팅 수단이었다. 삼양라면은 5개+1개를 묶어 2980원에 판다. 1개를 그냥 샀을 때 가격(596원)보다 16.8% 싸게 묶어 판다. 햇반은 1개를 살 때보다 8개 묶음 제품을 살 때 29.1% 싸다. 만두는 두 봉지를 묶어 40~50% 더 싸게 팔아왔다.
이 같은 묶음 판매는 소비자 심리를 겨냥한 과학적 마케팅 중 하나다. 마케팅 분야에서 ‘묶음 제품’에 관한 연구는 1979년 시작됐다. 영미권에서는 ‘번들(bundle)’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소비자가 여러 묶음 제품 중 복잡한 인지 과정을 거쳐 가장 합리적 대안을 선택하는 것은 소비 행위의 기본이다. 고전적 경제학 이론에서는 소비자가 여러 대안 중 가장 효용이 높은 대안을 선택할 때 가장 큰 만족과 성취를 느낀다고 본다. “소비자는 구색이 크고 다양해질수록 선호에 맞는 옵션을 찾아 소비하고, 그 가운데 만족감이 증가한다”는 것은 여러 행동경제학 분야 논문을 통해 이미 검증됐다.
‘묶음박스’ 때문에 가격정책 전면 수정
환경부의 재포장 규제는 이 같은 시장행위에 정면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 햇반을 8개 사고 싶은 사람은 8개 가격을 부담하라는 것이다. 8개를 묶어 놓은 박스 제품을 진열할 수는 있지만 ‘정가×8개’의 가격보다 싸게 팔 수는 없다. 30% 할인 혜택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화장품도 마찬가지다.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가 어버이날, 연말연시 등에 ‘선물세트’를 기획한 뒤 선물용 박스 안에 각종 사은품과 샘플 화장품을 넣어주던 것을 앞으로는 할 수 없게 된다. 이를 어기면 규칙의 상위법인 자원재활용법 41조에 따라 건당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적용할 수 있다.
창고형 할인매장은 예외…역차별 논란
기업들은 환경부가 묶음 할인 판매를 금지할 게 아니라 기업들로 하여금 환경친화적인 묶음 포장 도구를 개발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포장금지법을 도입하더라도 최소 1년간의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 1월 고시 행정 예고 후 5개월간 가이드라인도 없다가 시행일을 1개월 앞두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의견 청취와 시행에 나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형평성 문제도 있다. 환경부는 이마트 트레이더스, 롯데마트 빅마켓, 코스트코 등 창고형 할인매장에는 재포장 금지 예외 규정을 뒀다. 식품산업 관계자는 “창고형 할인매장에만 예외 기준을 적용하고 아직 온라인 유통업체에는 자세한 규정조차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환경부는 2차 간담회를 통해 묶음상품의 박스 재포장 등만 규제하는 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부 관계자는 “올여름 판촉상품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 등을 감안해 3개월가량 유예 기간을 두는 방안을 업계와 협의 중”이라며 “과대 포장을 막으려는 것일 뿐 기업의 마케팅 활동을 제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김보라/박종필/구은서 기자 destinybr@hankyung.com
환경부는 지난 18일 유통과 식품업계 등에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촉진에 관한 법률’의 하위 법령인 ‘제품의 포장재질·포장방법에 관한 기준 등에 관한 규칙’ 개정안(재포장금지법)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환경부가 지난 1월 28일 개정·공포한 재포장금지법의 구체적인 시행 방안이다.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다음달부터 묶음 판매는 가능하지만 묶음 ‘할인 판매’는 금지된다. 2000원짜리 제품 2개를 묶어 4000원에 판매하는 것은 합법이지만, 2000원짜리 2개를 묶어 3900원에 판매하는 건 위법이다. 서로 다른 종류의 상품을 한 박스에 모아 파는 것도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롯데제과가 자사 과자 제품 10개를 모아 한 박스에 넣어 파는 ‘과자 종합선물세트’도 팔 수 없게 된다.
환경부 측은 “식품업계에서 묶음 할인 경쟁이 치열하다 보니 이를 묶을 때 사용하는 접착제와 플라스틱 또는 포장박스가 과도하게 쓰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업계와 학계는 수십 년간 이어온 마케팅과 가격경쟁 체제를 무너뜨려 결국 소비자 편익을 떨어뜨리는 규제라고 해석하고 있다. 환경 유해성에 관한 근거나 영향평가 없이 과도하게 시장가격에 개입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많이 샀을 때 깎아주는 건 소비자 후생이고, 가격 인센티브를 통해 소비를 증대하는 정상적인 경제 행위”라며 “선진국 기업들도 흔히 쓰는 묶음 할인 판매를 포장으로 규제하는 것은 세계 최초”라고 지적했다.
유통업체 간 역차별 문제도 있다. 환경부는 트레이더스 등 대규모로 판매하는 창고형 할인마트에는 묶음 할인 판매를 허용해줬다. 온라인쇼핑 업체에 대해서도 판단을 보류했다. 과대 포장으로 많은 문제가 제기됐던 쿠팡, 마켓컬리, 쓱닷컴 등 온라인 유통업체의 재포장과 관련해선 아직 논의조차 못하고 있다.'햇반·라면 묶음' 싸게 팔면 불법…과자·맥주값도 줄줄이 오를 판
'하나 덤' 사은품도 금지…과도한 시장가격 개입 논란
환경부의 ‘재포장금지법’이 시장을 뒤흔들고 있다. 환경보호 명분으로 묶음 할인 판매라는 고전적인 마케팅 활동을 금지시키는 무리수라는 비판이 터져나오고 있다. 일각에서는 “무리하게 규제 위주로 환경 정책을 펼 게 아니라 인센티브 위주로 가야 한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식품·유통·포장업계를 혼란에 빠뜨린 환경부가 시장의 목소리를 어느 정도 수렴할지 주목되고 있다. 소비자-기업 ‘윈윈’하던 규모의 경제
자동차 한 대를 제조할 때 비용이 1000만원이라면 두 대를 생산할 때 비용은 2000만원이 아니다. 재료비와 전력, 인건비는 더 들지만 공장 생산시설 등 비용은 그대로기 때문이다. 두 대를 제조할 때는 2000만원보다 훨씬 덜 든다. 많이 만들어 많이 팔수록 하나를 더 제조할 때 드는 ‘평균비용(average cost)’이 줄어든다는 경제학의 원리다. 팔 때도 마찬가지다. 많이 만들어 많이 팔 때, 어느 선까지 할인해야 최대 이익이 날지를 기업들은 늘 계산한다. 기업은 그렇게 규모의 경제를 실현해왔다.
식품·화장품 등 소비재업계는 이 원리를 수십 년간 가장 많이 적용해온 분야다. 묶음 할인 판매는 기업과 소비자 모두 ‘윈윈’할 수 있는 보편적인 마케팅 수단이었다. 삼양라면은 5개+1개를 묶어 2980원에 판다. 1개를 그냥 샀을 때 가격(596원)보다 16.8% 싸게 묶어 판다. 햇반은 1개를 살 때보다 8개 묶음 제품을 살 때 29.1% 싸다. 만두는 두 봉지를 묶어 40~50% 더 싸게 팔아왔다.
이 같은 묶음 판매는 소비자 심리를 겨냥한 과학적 마케팅 중 하나다. 마케팅 분야에서 ‘묶음 제품’에 관한 연구는 1979년 시작됐다. 영미권에서는 ‘번들(bundle)’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 소비자가 여러 묶음 제품 중 복잡한 인지 과정을 거쳐 가장 합리적 대안을 선택하는 것은 소비 행위의 기본이다. 고전적 경제학 이론에서는 소비자가 여러 대안 중 가장 효용이 높은 대안을 선택할 때 가장 큰 만족과 성취를 느낀다고 본다. “소비자는 구색이 크고 다양해질수록 선호에 맞는 옵션을 찾아 소비하고, 그 가운데 만족감이 증가한다”는 것은 여러 행동경제학 분야 논문을 통해 이미 검증됐다.
‘묶음박스’ 때문에 가격정책 전면 수정
환경부의 재포장 규제는 이 같은 시장행위에 정면 도전하고 있다. 앞으로 햇반을 8개 사고 싶은 사람은 8개 가격을 부담하라는 것이다. 8개를 묶어 놓은 박스 제품을 진열할 수는 있지만 ‘정가×8개’의 가격보다 싸게 팔 수는 없다. 30% 할인 혜택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화장품도 마찬가지다. 아모레퍼시픽의 설화수가 어버이날, 연말연시 등에 ‘선물세트’를 기획한 뒤 선물용 박스 안에 각종 사은품과 샘플 화장품을 넣어주던 것을 앞으로는 할 수 없게 된다. 이를 어기면 규칙의 상위법인 자원재활용법 41조에 따라 건당 3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적용할 수 있다.
창고형 할인매장은 예외…역차별 논란
기업들은 환경부가 묶음 할인 판매를 금지할 게 아니라 기업들로 하여금 환경친화적인 묶음 포장 도구를 개발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재포장금지법을 도입하더라도 최소 1년간의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지난 1월 고시 행정 예고 후 5개월간 가이드라인도 없다가 시행일을 1개월 앞두고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의견 청취와 시행에 나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형평성 문제도 있다. 환경부는 이마트 트레이더스, 롯데마트 빅마켓, 코스트코 등 창고형 할인매장에는 재포장 금지 예외 규정을 뒀다. 식품산업 관계자는 “창고형 할인매장에만 예외 기준을 적용하고 아직 온라인 유통업체에는 자세한 규정조차 없는 것으로 안다”고 했다.
환경부는 2차 간담회를 통해 묶음상품의 박스 재포장 등만 규제하는 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환경부 관계자는 “올여름 판촉상품을 미리 만들어 놓은 것 등을 감안해 3개월가량 유예 기간을 두는 방안을 업계와 협의 중”이라며 “과대 포장을 막으려는 것일 뿐 기업의 마케팅 활동을 제한하려는 의도는 아니다”고 말했다.
김보라/박종필/구은서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