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방한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오른쪽)과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한경DB
2019년 7월 방한한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오른쪽)과 만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 한경DB
"바둑으로 치면 50수 앞을 내다보고 인생 최대의 베팅을 했다."

손정의(일본명 손 마사요시) 소프트뱅크 회장이 2016년 영국 반도체 설계업체 'ARM홀딩스'를 320억달러(약 39조원)에 인수한 뒤 밝힌 소감이다. ARM은 모바일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GPU(그래픽처리장치) 등 거의 모든 반도체의 기본 설계도를 제작하고 관련 특허를 팔아 수익을 내는 기업이다. ARM은 회사의 정체성에 대해 "우리의 사업은 기초과학기술이다(Our business is foundational technology)"라고 소개한다.

4G, 블루투스 등과 관련한 표준필수특허를 갖고 있는 통신 반도체 강자 미국 퀄컴, '엑시노스' 반도체를 만들며 시스템반도체 사업을 확대하고 있는 삼성전자까지 ARM의 설계를 기반으로 자신들의 노하우를 더해 칩을 만든다.

ARM은 설계도를 공짜로 공개하지 않는다. 퀄컴, 애플, 삼성전자 등은 ARM에 꼬박꼬박 로열티(특허료)를 납부한다. ARM의 주 수입원이다. ARM의 실적은 최대주주인 소프트뱅크가 공시한 서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2017회계연도 기준 ARM의 매출은 1525억2000만엔(약 1조7148억원), 영업이익은 242억9000만엔(약 2700억원)이다.

2016년 손 회장은 ARM홀딩스를 ARM 연간 영업이익의 약 140배를 주고 샀다. '비싸게 샀다'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손 회장의 선구안을 의심하지 않았다. 손 회장의 성공 신화 영향이 컸다. 손 회장도 자신만만했다. 그는 인수 당시 기자회견에서 "사물인터넷(IoT)는 기회가 될 것이고 ARM의 성장가능성을 감안하면 '저가'에 인수한 것"이라고 말했다. IoT가 확산되면 모든 전자기기에 ARM의 설계자산이 들어갈 것이고 ARM의 성장성은 더 커질 것이란 게 손 회장의 인수 근거였다.

약 4년이 지난 요즘. ARM홀딩스가 매물로 나왔다는 얘기가 반도체 업계에 돌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소프트뱅크가 ARM홀딩스의 지분 전부, 또는 일부를 매각하거나 상장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버, 위워크 등 소프트뱅크가 투자한 기업들이 실망스러운 실적을 기록하면서 소프트뱅크가 2019회계연도(2019년 4월~2020년 3월)에 167억달러(약 20조원)의 손실을 기록한 게 ARM홀딩스 매각설이 나온 이유로 꼽힌다. IoT 사업이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로 꼽히지만, 관련 산업이 예상만큼 성장하지 못한 것도 매각설의 원인으로 거론된다.


삼성전자 애플 등 반도체 업체들이 ARM 매각에 연결되고 있다. ARM의 유력한 인수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ARM의 설계자산이 경쟁업체 손에 들어가는 일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것이란 관측 때문이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만약 ARM을 인수한 특정 반도체 기업이 '설계자산 독점'을 선언하거나 '로열티 대폭 인상' 등을 선언하면 난처한 입장이 될 수 있다. 최근 ARM이 삼성전자, 퀄컴 등에 '로열티 4배 인상' 등을 요구했다는 소문도 흘러 나온다.

ARM 매각설이 사실이란 것을 전제로, 반도체 업계에선 애플이 ARM에 큰 관심을 가질 것으로 보고 있다. 애플의 행보 때문이다. 최근 애플은 인텔과 결별하고 '애플실리콘'이란 맥(Mac)용 CPU(중앙처리장치)를 자체개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CPU 개발의 기초가 되는 설계자산은 ARM의 것을 활용한다. 애플의 스마트폰용 AP(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 'A' 시리즈도 ARM의 설계 자산을 활용한다.

삼성전자 역시 ARM에 관심을 가질만한 후보로 거론된다. 애플과 마찬가지로 삼성전자도 스마트폰, 차량용 AP인 엑시노스를 생산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AP에 들어가는 CPU, GPU 등에 ARM의 설계 자산을 활용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ARM이 경쟁자 애플이나 퀄컴 등에 넘어가는 것도 삼성전자 입장에선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과 손 회장의 친분이 두터운 것도 삼성전자가 ARM 인수후보에서 빠지지 않는 이유로 꼽힌다.

월스트리트저널에 따르면 소프트뱅크는 매각·IPO(기업공개)를 세계적인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와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소프트뱅크가 ARM의 지분 전부를 매각하기로 한다면, 손 회장은 적어도 4년 전 매수금액(320억달러)보다 30% 이상 많은 금액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시장에선 ARM 매각액이 400억달러(약 48조원)에 달할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현금 100조원을 보유하고 있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도 부담스러운 금액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리스크(위험)를 안고 50조원 가까운 금액을 한 번에 동원할 수 있는 기업도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손 회장과 소프트뱅크가 ARM의 일부 지분을 매각이나 상장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란 관측이 힘을 얻고 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