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한경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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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은 세계 반도체 역사에서 ‘격변기’로 기록된다. ‘패스트 팔로어(빠른 추격자)’로 취급되던 삼성전자가 그해 8월 1일 세계 최초로 64Mb(메가비트) D램 시제품 개발을 공표하며 판을 흔들었다. 삼성은 여세를 몰아 연말에는 D램 시장 세계 1위에 올라섰다.

28년이 지난 지금, 글로벌 반도체산업이 다시 격동의 시기를 맞았다. 요동치고 있는 반도체업체의 시가총액 순위가 대표 사례다. 28일 대만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인 TSMC의 주가는 대만 증시에서 2.47% 상승, 시가총액이 3807억달러(약 457조원)를 웃돌며 세계 반도체업계 1위 자리를 굳혔다.

그래픽처리장치(GPU) 전문업체인 엔비디아는 독보적인 기술력을 인정받아 올해만 주가가 77.8% 수직 상승했다. 시총은 2563억달러(306조원·27일 뉴욕증시 기준)로 2위 삼성전자(390조원)를 뒤쫓고 있다. 세계 시장을 호령하던 인텔은 2098억달러(약 251조원)로 4위로 곤두박질쳤다.

인텔의 추락은 자초한 측면이 크다. 지난 23일 주력 제품인 중앙처리장치(CPU)의 7나노미터(㎚) 공정 생산 시기를 6개월 연기한다고 발표하면서 시장에 충격을 줬다. “자만에 빠져 기술 투자를 게을리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D램을 앞세워 28년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독주하고 있는 삼성전자 역시 ‘기로에 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상반기 반도체사업 영업이익은 TSMC에 못 미치고, 시스템 반도체 사업으로 체질 개선을 시도 중이지만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도 18.8%로 TSMC에 30%포인트 이상 뒤처져 있다. ‘텃밭’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선 YMTC, CXMT 등 중국 업체들의 거센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삼성전자 내부의 위기감이 상당하다. 삼성 ‘반도체 신화’의 주역인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은 이날 사내방송에 나와 “위험한 순간에 과감하게 결정할 수 있는 최고경영진의 결단과 리더십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텔의 쇠락, TSMC·엔비디아 약진…글로벌 반도체 판이 흔들린다
인텔, 7나노 양산 6개월 연기…경쟁사 AMD에 밀려

삼성 '28년 반도체 질주' 기로에 섰다
한 세대간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았던 업체들은 인텔, 삼성전자같이 제품 설계부터 생산까지 모든 사업 영역에 관여하는 ‘종합 반도체 기업(IDM)’이었다. 최근 들어선 시장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반도체 설계에 특화한 엔비디아, AMD 같은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업체와 팹리스의 주문을 받아 ‘맞춤형 생산’을 전문으로 하는 TSMC 등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들이 주목받으며 시장의 ‘판’을 바꾸고 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최첨단 기술에 대한 수요가 커지면서 종합 반도체 업체보다 좁은 사업 영역에 집중해 독보적인 기술과 영역을 구축한 ‘특화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진 영향이 크다.

‘기술력 부족’ 고백한 인텔

28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IDM 쇠락의 대표적 사례로 인텔이 꼽힌다. 인텔은 지난 23일 “7㎚(나노미터, 1㎚=10억분의 1m) 공정으로 CPU(중앙처리장치)를 양산하는 일정을 6개월 늦춘다”고 발표했다. 고성능 반도체를 값싸게 제조할 수 있는 7㎚ 미세공정 도입을 반년이나 미루자 업계에선 “인텔이 자사 제품 중심으로 시장이 돌아간다”는 관성에 젖어 기술 투자를 소홀히 한 측면이 컸다고 지적했다. 인텔은 약 3년 전부터 ‘수익성’을 중시하면서 TSMC, 삼성전자가 주력한 회로선폭 미세화에 투자를 게을리했다. 인텔은 현재 10㎚ 공정이 주력이다.

반면 인텔의 경쟁자인 AMD는 약 6개월 전부터 파운드리 업체 TSMC에 주문을 넣어 7㎚ 공정에서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과거의 명성에 기댄 인텔은 지난해 CPU 시장의 84.5%를 차지했지만 올해는 AMD가 선전할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GPU로 주목받는 엔비디아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GPU(그래픽처리장치) 시장 등에서도 ‘특화 기업’의 선전이 두드러진다. 미국 엔비디아는 게임용 GPU 생산에서 최근 AI(인공지능) 고도화에 필수적인 머신러닝용 GPU로 방향을 틀면서 ‘4차 산업혁명의 총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2563억달러(약 306조원)로 인텔(2098억달러·약 251조원)을 가볍게 제치고 세계 반도체 기업 중 3위에 올라 있다. 대규모 그래픽 처리가 필수적인 자율주행차용 반도체 시장에도 진출했다.

최근엔 영국 ARM의 유력한 인수 후보로도 거론된다. ARM은 애플, 퀄컴 등 팹리스에 설계도를 제공하는 업체로 ‘팹리스 중의 팹리스’로 불릴 정도로 반도체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높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2016년 32조원에 인수했지만 최근 45조원 안팎에 매각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등도 최근 ARM 매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메모리 기술격차 1년 이내로 좁혀져

인텔의 추락을 지켜보는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착잡하다”는 반응이 나온다. 지난해 4월 이재용 부회장이 ‘시스템 반도체 비전 2030’을 발표하고 파운드리, 팹리스 사업으로 방향타를 돌렸지만 아직 눈에 띄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2분기 기준 삼성전자 점유율은 18.8%로 1위 TSMC(51.5%)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러 있다. 초미세 공정에선 5㎚까지 대등하게 달리고 있지만, 반도체 디자인·후공정 업체 등과 연계해 제공하는 ‘종합서비스’ 경쟁력이 뒤처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텔이 파운드리 물량을 확대할 경우 삼성전자가 주문을 받을 것이란 관측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는 ‘TSMC 독식’에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이날 대만의 한 매체는 “인텔이 주문한 6㎚ GPU 위탁생산 물량을 TSMC가 따냈다”고 보도했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선 중국 업체의 도전이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중국 YMTC는 지난 4월 128단 3차원 낸드플래시 개발 소식을 발표했다. 양산 여부를 떠나 기술 수준만 놓고 보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지난해 상반기 공개한 것과 차이가 없다. D램 분야에선 CXMT가 올해 말 제품을 출시할 계획이다.

삼성의 위기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올 상반기엔 D램, 낸드플래시, 파운드리, 팹리스 등 반도체 종합 포트폴리오를 갖추고 있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영업이익 추정치(9조9900억원·83억5966만달러)가 파운드리만 하는 TSMC(86억4700만달러)에 못 미쳤다는 분석도 나온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후발업체의 기술 격차가 1년 이내로 좁혀졌다”며 “텃밭을 빼앗기고 시스템 반도체에선 성과를 못 내는 진퇴양난에 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황정수/송형석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