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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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무서우니까 로펌에서 검찰 출신만 찾는 거고, 형님도 그 연봉 받는 거잖아."

영화 '더 킹'에서 부장검사 한강식(배우 정우성)이 전관 출신 변호사 문희구(배우 정원중)에게 한 대사다. 문희구가 한강식이 맡은 수사 피의자의 변호인이 돼 한강식을 만난 자리에서다.

문희구는 검찰에서 한강식의 직속 상사였고, 그만둔 뒤 국내 최대 로펌의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전관예우를 이용해 한강식을 눌러버리겠다는 의도였지만, 한강식은 오히려 "검찰이 살아야 형님도 살지"라며 문희구를 돌려보냈다.

이 장면은 검찰이 칼을 휘두를수록 검찰 출신 변호사의 몸값이 높아지는 모습을 꼬집은 것이다.

검찰과 전관 변호사만 있는 게 아니다. 현실에선 더 다양하다. 대표적인 것이 '경제 검찰'로 불리는 공정거래위원회와 공정위 출신 고위 공무원이다.

공정위가 칼을 휘두를수록 공정위 출신 전관들의 몸값은 높아진다. '공정 경제'를 내세우는 현 정부에서 공정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공정위 출신 고위 공무원에 대한 수요는 더 커졌다. 관련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로, 전문적인 조언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공정위와의 원활한 접촉을 위해서나 향후 소송 과정에서 도움을 받기 위해 기업이 공정위 출신 전관을 영입하는 것이다.

공정위는 현 정부 출범 직후 '재계 저승사자'로 불리는 기업집단국을 신설했다. 기업집단국은 3년 만에 일감 몰아주기 11건 등 30건의 사건을 처리, 총 1500억원이 넘는 과징금을 물리고 법인 38개와 총수 일가 등 개인 25명을 고발했다. 공정위는 최근엔 여당과 함께 공정거래법 전면 개정을 밀어붙이고 있다. 대기업 규제 수위를 더 높이는 것이 골자다.

기업들은 최근 퇴직공직자 취업제한 기간(3년)이 끝나는 공정위 출신 전관들을 대상으로 취업 의사를 타진하고 있다. 한 대기업 대관 담당자는 “공정거래법이 개정되면 기업들이 각종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더 커진다”며 “아무래도 공정위 출신들의 도움을 찾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미 공정위 출신들은 주요 대기업의 사외이사로 포진해 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올해 반기보고서를 제출한 상장사 가운데 38곳이 공정위 위원장, 부위원장, 상임위원, 사무처장 출신 등 전직 관료를 사외이사 등으로 두고 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지난 20대 국회에서부터 논의된 만큼 대기업들이 전관예우를 염두에 두고 일찌감치 공정위 출신 고위 관료를 영입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법 통과 이후 발생할 수 있는 각종 고발에 대비하고, 공정위 조사에 미리 대응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공정위 수장인 위원장 출신으로는 백용호(LG전자), 김동수(두산중공업), 노대래(헬릭스미스), 정호열(제이에스코퍼레이션) 전 위원장이 기업 사외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부위원장 출신은 김병일(삼천리), 손인옥(한진, 현대차증권) 등이 있다.

공정위 상임위원과 사무처장 출신도 상당수다. 정중원(롯데케미칼·진에어), 안영호(LG화학, 신세계), 주순식(한진칼), 이병주(매일홀딩스), 장용석(신원종합개발) 등이 상임위원 출신이다. 사무처장 출신으로는 이동훈(현대글로비스·DB), 이동규(현대차) 등이 이름을 올리고 있다.

퇴임한 고위 공직자들이 몇 해 지나 기업의 사외이사로 가는 것 자체가 위법은 아니다. 그러나 규제를 강화해 자신들의 퇴직 이후를 보장받는다는 점에서 ‘이해 상충’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전관들이 공정위에서 칼을 휘두르고, 그 덕분에 몸값을 높이는 것이 적절하냐는 지적이다.

전관 출신들이 큰 역할을 해서인지, 공정위가 지난 10년 동안 과징금 관련 소송에서 패소해 돌려준 돈은 7700억원이 넘는다. 기업으로선 전관을 영입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공정위에서 일할 땐 규제 강도를 높여 과징금을 물리고, 퇴직 후엔 기업에 가서 그 과징금을 없던 일로 하는 게 전관들의 역할이라면 너무 억측일까.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