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김선우 기자 naeej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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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준비됐어. 다이아몬드가 되어 빛나겠어.(I’m good to go. I’m diamond, you know I glow up.)”

지난해 11월 SK하이닉스에서 열린 4분기 올핸즈미팅(all-hands meeting) 참가자들은 깜짝 놀랐다. 이석희 사장이 임직원에게 각오를 밝히며 인기 그룹인 BTS의 최신 히트곡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가사를 인용해서다. 50대 중반의 최고경영자(CEO)지만 마음만은 사원, 대리급 직원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BTS를 언급한 것. 인텔의 낸드플래시 부문 인수를 계기로 D램과 낸드 양 날개가 마련됐고 이제 성공할 일만 남았다는 게 이날 그가 임직원에게 전한 핵심 메시지였다.

올핸즈미팅은 CEO가 모든 회사 구성원과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전사 회의다. 누구나 손을 들어 발언 기회를 얻을 수 있어 ‘올핸즈’라는 이름이 붙었다. 평소 소통을 중시하는 이 사장은 2018년 취임 직후 성과발표 위주의 경영설명회를 올핸즈미팅으로 바꿔 직원들과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SK하이닉스 직원들이 이 사장을 ‘큰형님’으로 여기는 배경이기도 하다.

인텔도 인정한 반도체 천재

이 사장은 엔지니어 출신이다.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뒤 SK하이닉스 전신인 현대전자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얼마 후 그는 미국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가 재료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가 미국에서 선택한 직장은 당시 세계 최대 반도체업체였던 인텔이다. 이 사장은 공정 기술 엔지니어로 인텔에서 10년을 일했다. 시스템 반도체 생산라인의 주요 공정에 오류가 있는지를 찾고 이를 개선하는 것이 그의 업무였다.

이 사장의 동료들은 그를 ‘스타 엔지니어’로 기억한다. 재직 기간 인텔 기술상(IAA)을 받은 것만 세 번이다. IAA는 인텔 경영진이 1년에 단 한 명에게만 수여하는 특별한 상이다. 업계 관계자는 “이 사장이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며 한국으로 가겠다고 하자 ‘언제든 올 수 있도록 자리를 비워놓겠다’는 답이 돌아왔다”며 “이 사장이 인텔에서 인정받는 인재였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고 말했다.

한국에 돌아온 이 사장은 KAIST 전자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하이닉스(현 SK하이닉스)와 다시 인연을 맺었다. SK그룹이 그에게 하이닉스 인수와 관련한 자문을 한 것. 하이닉스의 SK그룹 편입이 마무리된 뒤 그룹 경영진은 이 사장에게 SK하이닉스 사외이사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 사장의 답은 ‘노(no)’였다. 기업에서 오래 일했고, 후학을 양성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SK도 물러서지 않았다. “산업 현장에서 엔지니어를 양성하고 대한민국 반도체 경쟁력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의미있는 일”이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이 사장을 설득했다. SK의 삼고초려 끝에 이 사장은 2013년 미래기술원장(전무)을 맡으며 SK하이닉스로 되돌아왔다.

한 손엔 ‘책’, 한 손엔 ‘술잔’

이 사장은 미래기술원장 시절부터 일찌감치 회사의 최고기술책임자(CTO) 재목으로 꼽혔다. 인텔이 인정한 반도체 엔지니어, KAIST가 보증하는 반도체 석학이란 점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SK하이닉스 경영진의 선택은 CTO가 아니었다. 전임 CEO였던 박성욱 SK하이닉스 부회장은 2018년 말 그를 차기 CEO로 지목했다.

이 사장의 지인들에게 그가 CEO까지 오를 수 있던 배경을 물으면 “한 손엔 책, 한 손엔 술잔”이란 답이 돌아온다. 이 사장은 업계에서 유명한 독서광이다. 여유가 있을 때마다 책을 편다. 장르도 따지지 않는다. 어제는 역사, 오늘은 인문학과 관련된 책을 읽는 식이다. 특히 신간 욕심이 많다. 국내에 번역본이 출간되기 전에 책을 읽고 싶은 마음에 매달 미국 온라인서점 아마존에서 10권 이상의 책을 ‘직구’한다. 그에게 이유를 물었을 때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다. “내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건 책이 아니라 금덩어리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이 사장은 독서광인 동시에 공부광”이라며 “SK하이닉스의 전신인 현대전자에 입사해 사회 초년을 보내던 시절에도 매일 밤 논문 한 편을 읽고 퇴근하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설명했다.

영업통이 아님에도 그의 주량은 상당하다. 소주 한두 병은 예사다. 이 사장은 술을 “기업과 기업,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드는 윤활유”라고 얘기한다. 고객과의 만찬 자리에서 상대가 호의를 느낄 수 있도록 배려하고 고객이 권하는 술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가 내세우는 ‘주도(酒道)’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 사장의 특징이다. 그는 지난해 11월 애널리스트들을 대상으로 한 3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맡아온 전례를 깨뜨렸다. 이 사장은 “5년 안에 15조원의 낸드 매출을 올리겠다”고 단언하며 SK하이닉스가 인텔의 낸드플레시 사업부를 비싸게 샀다는 논란을 잠재웠다.

시가총액 100조원 목표 달성

그에게도 난관은 있었다. CEO 취임 직후인 2019년은 반도체 시장 침체기였다. 그해 7월 시작된 일본 수출규제도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이 사장이 내놓은 해법은 엉뚱했다. ‘구성원이 행복한 회사’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그는 “언 발에 오줌 누기식 처방보다는 본원적인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제일 먼저 직원들의 기부터 살리겠다”고 강조했다. 그해 SK하이닉스는 27조원의 매출과 2조700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지난해 역시 만만찮았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경영환경이 ‘시계제로’ 상태에 빠졌다. 그는 코로나19가 야기한 위기를 기회로 봤다. 친정인 인텔과의 협상을 통해 낸드플래시 부문을 10조원에 사들이며 ‘D램만 잘하는 기업’이란 꼬리표를 떼는 데 성공했다. 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코로나19로 살아난 D램 수요를 빨아들이는 데 힘썼다. 업계에서는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영업이익을 5조원 선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사장은 2019년 신년사에서 “3년 뒤 시가총액 100조원, 기술 혁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의 주가가 6만원 선까지 빠지며 시총이 50조원을 밑돌 때 꺼낸 얘기였다. 지난 8일 SK하이닉스의 종가는 13만8000원으로 시총 100조원을 넘어섰다. 약속보다 1년 먼저 목표를 달성했다.

■ 이석희 사장은

△1965년 경북 경산 출생
△1984년 서울 영동고 졸업
△1988년 서울대 무기재료공학과 학·석사
△1990년 현대전자 입사
△2000년 인텔 입사
△2001년 미국 스탠퍼드대 재료공학 박사
△2010년 KAIST 전자공학과 부교수
△2013~2015년 SK하이닉스 미래기술연구원장, D램개발사업부문장
△2017년 SK하이닉스 사업총괄(COO)
△2018년~ SK하이닉스 사장(CEO)
△2019년~ 한국공학한림원 정회원
△2021년~ 한국공학한림원 부회장, 대한전자공학회 부회장


송형석 기자 clic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