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루이비통 매장(왼쪽)에서도 소비자들이 건물 바깥까지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루이비통 매장(왼쪽)에서도 소비자들이 건물 바깥까지 줄을 지어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해도 뜨지 않은 오전 5시. 롯데,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노상 아스팔트에는 낚시의자를 손에 든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김중도 씨(가명·56)는 익숙한 듯 샤넬 매장 앞에서 의자를 펴고 앉아 이불을 덮더니 말없이 스마트폰을 내려봤다. “물건을 사러왔다”고 말을 건네자 오픈런 노하우를 털어놨다. 그는 샤넬 제품을 중고시장에 팔아 수익을 얻는 ‘샤테크’(샤넬+재테크)를 위해 야간 일을 마치고 오전 4시부터 강남·북 백화점 여섯 곳을 순회한다. 김씨는 “샤넬 핸드백을 사는 데 성공하면 30만원을 벌 수 있다”며 “여기 있는 사람 대부분이 그걸 노리고 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욕망의 ‘설국열차’ 명품 오픈런

지난 4일 오전 6시께 신세계백화점 본점 샤넬 매장 앞에서 구매 대기자들이 캠핑 의자에 앉아 번호표를 기다리고 있다. /이혜인 인턴기자
지난 4일 오전 6시께 신세계백화점 본점 샤넬 매장 앞에서 구매 대기자들이 캠핑 의자에 앉아 번호표를 기다리고 있다. /이혜인 인턴기자
이날 샤넬 ‘오픈런’을 하는 사람에게도 모두 제각기 사연이 있었다. 같은 줄에 서 있었지만 남루한 차림부터 머리에서 신발까지 명품으로 치장한 사람까지 목적도 행색도 달랐다.

오전 6시 27번이던 번호표는 10시에 105번까지 늘어났다. 갓 결혼한 딸과 사위에게 명품을 사주고 싶다는 60대 노부인부터 한 달 전에 결혼하고 함께 ‘오픈런’ 중인 신혼부부, 하루 일당 10만원을 벌기 위해 서 있는 ‘줄서기 알바’, 명품을 되팔기 위해 모인 ‘리셀러’까지 다양했다.

약 200m 오픈런 줄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리셀러들이다. 이들은 명품시장의 희소성을 이용해 샤넬 인기 상품을 매입한 뒤 시세가 높을 때 재판매한다. 김씨는 “요새 인기있는 샤넬 ‘클래식 미듐’은 100만~200만원 웃돈을 주고 판다”며 “상품권 ‘깡’을 이용해 약 3% 저렴하게 구매해 되팔면 수익이 더 높아진다”고 말했다. 상품권과 카드 캐시백 등을 이용하면 500만원당 15만원의 차액을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들은 오전 11시께 압구정 현대백화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압구정 현대백화점에 ‘클래식 미듐’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서다. 자리를 뜨면서 그는 “최근에는 작은 사업체까지 꾸리기도 했다”고 귀띔했다.

"미듐백 사오면 30만원" 알바, "칠순 셀프선물" 老부인까지 새벽줄
오전 7시가 되자 신세계백화점 앞에는 50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줄서기 알바들은 익숙한 듯 담요를 깔고 누웠다. 줄을 대신 서면 수고비로 일당 8만~10만원을 받을 수 있고, 원하는 물건을 사주면 수고비가 최고 30만원까지 올라간다.

긴 줄의 중간에는 일반인들이 보였다. 결혼 예물이나 지인의 선물을 사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다. 30대 이씨는 “결혼 4주년 기념으로 남편이 선물을 사준다고 해서 왔다”며 “생각해 둔 물건이 없으면 다른 핸드백이라도 무조건 사겠다”고 했다.

오전 9시가 넘어가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매장 앞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오픈런을 한다고 해서 원하는 상품을 살 수 있는 게 아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온 70대 신모씨는 “칠순이라고 아들과 딸이 명품을 사준다고 해 직접 돌아다니고 있다”며 “제품을 사고 못사고는 팔자에 달렸다고 해서 ‘팔자런’이라고 한다”고 했다. 벌써 아홉 번째 새벽 줄서기라고 했다.

세계 7위로 커진 한국 명품시장

국내 명품시장은 신분 상승욕과 과시욕, 열등감, 모방심리 등 다양한 심리를 먹으며 성장하고 있다.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국내 명품시장은 지난해 세계 7위 규모로 올라섰다. 한국 명품 매출은 작년 약 13조9000억원으로 독일을 넘어섰다. 미국, 일본,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서구권·일본 명품 시장이 20% 이상 감소할 때 한국시장은 코로나에도 상대적으로 성장했다.

해외 명품업체들도 국내 명품 열기에 놀란 모습이다. 오랜 기간 명품업계에 몸담아온 한 담당자는 “이런 명품 열기는 20년 만에 처음”이라는 분위기를 전했다. 최근 국내에서 시계 신제품을 론칭한 한 명품업체 관계자는 “한국에선 스테디셀러는 기본이고 최신 제품도 들여놓는 즉시 다 팔려버린다”며 “매출 증가 속도에 놀랄 정도”라고 했다.

1~2년에 한 번 올리던 명품가격도 1년에 4~5번씩 인상하고 상승폭도 5~6%에서 10%대로 커졌다. 그래도 명품 매장은 항상 미어터진다. 가격을 올리기 전에 구매하려는 사재기 열풍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 명품업계 관계자는 “명품은 가격이 상승하더라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제품군이 한정적”이라며 “이 때문에 가격을 올려도 소비자들이 구매를 멈추지 않는다”고 말했다.

백화점 업계도 명품수요 증가에 발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한 백화점 명품 바이어는 “코로나19 이전 주 고객층이 30~40대였다면 현재는 20~30대가 주도하고 있다”며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한국인의 독특한 심리적 특성 때문에 국내 명품시장은 계속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배정철/민지혜 기자·이서영/이혜인 인턴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