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 '불멍'
지난 5월 메가박스에서 조금 특별한 영화가 개봉됐다. 제목은 ‘메가 릴렉스 불멍’. 이 영화는 주인공도, 줄거리도 없다. 31분의 짧은 상영시간 동안 커다란 스크린은 일렁이는 모닥불로 가득 채워진다. 상영관에는 타닥타닥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만 들린다. 누군가는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느냐”며 쏘아붙이겠지만 막상 실제 관람객 평점은 10점 만점에 8점. 웬만한 할리우드 영화 뺨치는 성적표다.

최근 들어 ‘불멍’의 매력에 빠진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캠핑 간 김에 불멍을 하는 게 아니라 불멍을 하기 위해 캠핑을 떠난다는 이들도 있다. ‘불을 멍하니 바라본다’는 의미의 불멍은 준비물이 간단하다는 게 최대 장점이다. 마른 장작 한 뭉치와 라이터만 있으면 그곳이 불멍의 성지다. 불멍을 더 전문적으로 즐기고 싶다면 접이식 화로대만 하나쯤 더 챙기면 그만이다. 바쁜 일상에 치여 캠핑을 떠나기 어려운 불멍족을 위한 아이디어 상품도 나왔다. 에탄올 난로는 집에서도 불멍을 즐길 수 있도록 도와준다. 장작 없이 바이오에탄올을 연료로 불을 피우는 에탄올 난로는 연기와 냄새, 그을음이 없다. 가격도 2만~3만원대에서 시작해 큰 부담이 없다.

불멍 영상마저 인기다. 유튜브에는 조회수가 2000만 회에 달하는 불멍 영상도 있다. 영상 내용은 쉬지 않고 춤추며 타오르는 불꽃이 전부지만 매일 밤 이 영상이 없으면 잠들기 어렵다는 열성팬도 적지 않다. 불멍 영상은 넷플릭스에도 진출했다. 조지 포드 감독의 ‘가상의 따뜻한 자작나무 벽난로’는 한 시간 동안 자작나무가 타오르는 모습을 원테이크로 찍은 영상이다.

스스로를 ‘불멍 마니아’로 칭하는 직장인 김한나 씨(31)는 “캠핑장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멍하니 쳐다보면 복잡하던 마음이 차분해진다”며 “요즘은 집에서도 텔레비전에 불멍 영상을 틀어놓고 장작이 타들어가는 소리를 배경음악처럼 듣는다”고 말했다.

현대인은 왜 멍 때리기에 열광할까.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그 이유를 ‘휴식에 대한 갈망’으로 요약했다. 곽 교수는 “현대인은 수많은 매체에서 매일 쏟아지는 정보에 허덕이는 ‘정보의 번아웃’ 상태”라며 “이 같은 정보의 늪에서 벗어나 진정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멍하게 혼자 시간을 보내는 ‘자발적 고독’을 즐기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