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ESG] ESG와 법④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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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G(환경·사회·지배구조) 논의는 기관투자자를 통해 기업의 사회 활동을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인류가 직면한 환경, 사회,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하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ESG 개념을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2004년 ‘후 케어스 윈(Who Cares Win)’ 이니셔티브나 2006년 발족한 유엔 책임투자원칙(UN PRI)은 모두 기관투자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하지만 ESG 경영은 기관투자자의 ESG 투자를 통한 압박뿐 아니라 소비자, 근로자, 공급망 등 다양한 채널을 통해 기업에 피할 수 없는 요구로 다가오고 이러한 현상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글에서는 ESG 경영에 대한 다양한 압박의 경로에 대해 살펴본다.

ESG 주주제안에 반대 어려운 연기금

먼저 연기금의 ESG 경영에 대한 압박이다. 일반 시민의 자금을 관리하는 연기금으로서는 환경, 사회문제 해결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압력을 무시하기 어렵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주주의 단기 이익 추구에 대한 반감이 고조되었고, 기후변화 등 환경문제에 대한 시민의 우려도 어느 때보다 높다. EU는 2019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 취임 이후 ESG 관련 법제도 논의를 주도하고 있고 2021년 출범한 바이든 정부 역시 기후변화, 다양성, 기업의 책임 등 ESG 정신에 입각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사회적 압박은 연기금을 통해 자산운용사에 전달된다. 자산운용사들은 연기금으로부터 자산을 위탁받아 운용하기 위해서라도 ESG 투자를 추진할 수밖에 없다. 자산운용사들은 다시 지분을 보유한 기업의 경영진에 ESG 경영을 요구한다. 미국에서는 이른바 빅 3 자산운용사(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가 S&P500 회사에 대해 20% 안팎의 지분율을 보유하고 있기에 회사의 경영진이 이들의 ESG 경영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대형 자산운용사나 경영자들이 근래 들어 ESG 투자와 이해관계자에 대한 배려를 강조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연기금, 자산운용사 등 기관투자자의 전략은 크게 ‘매각’과 ‘참여’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매각(exit)은 기관투자자들이 보유 지분 매각을 통해 기업에 압박을 가하는 전략을 말한다. 네덜란드 연기금인 APG는 화석연료 발전사에 대한 투자를 중단하면서 한전의 주식을 처분했다. 기관투자자들이 주식을 매각하면 주가가 하락하고 회사의 자금 조달도 어려워지므로 이러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기업들은 ESG 경영에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러나 ESG 투자에 동참하지 않는 투자자에게는 오히려 해당 회사 주식을 저가에 매입하는 기회가 되므로 매각 전략에 한계가 있다.

참여(voice)란 지분 매각 대신 경영진과의 대화, 주주제안, 의결권 행사, 대표 소송 등의 방법을 통해 회사의 경영을 변화시키는 전략을 말한다. 국민연금기금을 비롯한 국내외 연기금은 이미 ESG 요소를 의결권 행사에 반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ESG 행동주의펀드도 등장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미국에서는 행동주의펀드인 엔진넘버원이 주주제안을 통해 추천한 후보가 엑손모빌의 이사로 선출되면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엔진넘버원의 엑손모빌에 대한 지분율은 0.02%에 불과했지만 주요 기관투자자들이 엔진넘버원의 주주제안에 찬성하면서 이러한 결과가 발생했다. ESG 관련 주주제안에 대해 연기금이나 자산운용사가 반대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주주행동주의도 향후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소비자·근로자의 보이콧 위험도

그런데 기관투자자들의 ESG 투자 전략은 대상회사에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잘 작동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지배주주 입장에서 투자자들의 ESG 관련 주주제안이나 의결권 행사가 부담되겠지만, 투자자들의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경영권을 상실할 위험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식 소유가 분산된 회사가 많은 미국이나 영국과 달리 우리나라처럼 대부분의 회사에 지배주주가 존재하는 경우에는 기관투자자의 ESG 투자로 인한 영향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시장에서의 자금 조달 필요성이 적은 기업이나 기관투자자의 영향력이 미치기 어려운 비상장 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는 투자자의 관여 등 자본시장(capital market)을 통한 압박보다는 소비자, 근로자들의 보이콧이나 글로벌 공급망에서의 요구 같은 상품시장(product market)을 통한 압박이 더 부담될 수 있다. 소비자나 근로자의 보이콧에는 일반적으로 집단행동문제가 제약으로 작용한다. 기업경영에 불만이 있더라도 소비자나 근로자들이 의견을 모아 보이콧이라는 집단행동을 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터넷 기술과 소셜 미디어의 발전은 이들 간 의견 교환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보이콧도 훨씬 쉬워졌다. 소비자나 근로자 같은 이해관계자의 의견이 회사 경영에 반영할 수 있는 기술적·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었다.

공급망을 통한 ESG에 대한 요구도 ESG 경영에 대한 압박이 된다. 글로벌 공급망 최상단에 있는 기업들은 이미 수년 전부터 공급망에 속한 기업에 생산과정에서의 오염물질 관리, 강제 노동 및 아동 노동 금지 같은 환경·사회적 기준의 준수를 요구해왔다. 최근에는 자회사나 하청업체의 인권·환경문제에 대해 실사를 통해 파악할 것을 요구하는 이른바 기업실사법이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국가를 중심으로 입법화되고 있다. 공급망을 통한 압박은 기업의 지배구조 여부와 관계없이 적용되고, 해당 국가에 설립되지 않은 회사도 영향을 받는다는 점에서 파급 효과가 클 수밖에 없다.

이처럼 ESG 경영은 투자자뿐 아니라 소비자, 근로자, 공급망 등 다양한 경로를 통해 요구되고 있다. ESG 경영이 한때의 유행이 아닌 지속적 변화로 진행될 것으로 전망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지배구조 현실에서는 ESG 투자를 통한 압박과 함께 각종 법제도가 실질적 압박으로 다가올 가능성이 높다. 투자자에 대한 대응을 넘어 ESG를 기업의 사업활동과 의사결정에 내재화하는 이른바 ESG 컴플라이언스 체계의 구축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정준혁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